언젠가 인터넷에서 그런 말을 봤다. 10대와 20대의 친구관계에서 다른 점이 있다면, 10대엔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친구를 만날 수 있지만 20대가 되면 정말 '시간을 따로 마련해서' 약속을 잡아야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학생이었던 그때의 나는 웃으며 그 말을 넘겼다. 하루에 가족보다 오랜 시간을 붙어있는 게 친군데 성인이 된다고 소원해지기야 하겠어, 하는 안일한 마음이었다. 그런 걸 보면 사람은 정말 스스로 겪어봐야 실감하는 것 같다. 나 또한 19년 동안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친구들과의 애틋함을 성인이 된 지 5개월 만에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니까.
인터넷에서 본 말은 진짜였다. 모든 상황을 일반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게는 선견지명에 가까웠다. 실제로 서울에 올라온 지 5개월 동안 친구를 만난 것은 두 번 정도다. 그럼 그동안 뭘 했냐는 질문에는 하루하루 살기 바빴다는 변명밖에는 할 게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더 이상 나와 타인을 동료관계로 묶어두는 학교라는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학교에 입학하긴 했지만, 여기는 모두가 개인으로 존재하는 세상이다. 발을 들인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사람 눈에도, '학생'이라는 이름 아래 타인과 순수한 유대감을 쌓으며 지내는 풋풋한 공간은 아닌 듯 보인다.
이곳에 와서 가장 많이 한 말은 '사람이 그립다'는 말이었다. 아예 낯선 곳에 발을 붙여야 했던 초반부에는 나오지 않던 표현이었다. 오히려 그때는 사람을 잊어버린 채 마냥 살아내기 바빴다. 누군갈 그리워할 깜냥도 되지 않던 시기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내가 몸담은 곳을 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즈음 외로움이 찾아왔다. 새로운 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개인이라는 자리를 틔우긴 틔웠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함께했던 것 중 곁에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스무 살이 되어 새로운 곳에 던져진 것처럼, 다른 친구들도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던져진 채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당연하게 만나 당연하게 '우리'라고 칭했던 사람들은 어느새 손도 닿지 않는 까마득한 곳에서 저마다의 '우리'를 만들어나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을 둘러싼 모든 환경은 변하는 법이고, 관계라 해서 예외는 없으니까. 우리를 엮어둘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예전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 당연함을 몰랐던 미련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허망함에 치를 떨어야 했다.
그 허망함 속에서, 비로소 나는 내가 사랑했던 이들에게 애틋함이라는 핀을 꼽아두었다. 너무 빨리 돌아가는 세상의 흐름에서 혹여나 기억 속의 그들이 쓸려가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었다. 내가 아끼고, 나를 아꼈던 그들과의 관계가 당연하지 않았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결코 쿨하게 이 관계를 잊어버릴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제는 같은 학교의 교우가 아닌, 각자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사회에 이르렀지만 나는 여전히 그들과 우리이고 싶다. 그러기 위해 과거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더라도.
연락 한 번 제대로 하지 않는 친구를 둔 나의 친구들에게. 바빴다는 말로 그간의 침묵을 무마하기엔 무리라는 걸 안다. 그런데 그 염치없음을 감수하더라도 남이 되긴 싫어 말을 남긴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여전히 네가 기쁠 때 같이 웃고 슬플 때 울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이고 싶다. 어쩔 수 없이 소원해지는 게 당연한 거라 해도 우리는 예외였으면 좋겠다.
표현에 박하고 융통성 없는 나랑 친구해줘서 고맙고, 괜찮으면 우리 앞으로도 오래오래 친구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