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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May 27. 2021

47. 공연 2

삶에서 처음 겪어 보는 종류의 시간

 공연하는 곳에는 이미 노랫소리가 퍼지고 있었다. 잔잔한 밴드 음악부터 소위 말하는 느낌 있는 음악들이 거리를 메웠다. 그렇게 다른 학교에서 오신 음악 동아리 분들이 공연을 이어가는 와중, 나는 홀로 근처를 서성이며 사람들을 기다렸다. 다행히 다른 한 분이 뒤이어 도착하셔서 외롭지는 않았지만 갈 곳 없는 사람이 둘이 된 것뿐 달라진 건 없었다. 그렇게 다른 공연의 노래를 들으며 오장육부까지 떨리는 긴장을 쥐고 있기를 20분 정도가 흐르자 하나 둘 부원들이 도착했다. 반가움에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도 잠시, 리허설을 알리는 스태프 분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우리는 서둘러 루프탑으로 올라갔다.


 옆 건물의 지붕과 근처 건물들이 모두 내려다보이는 루프탑의 시야는 색다른 긴장을 안겨줬다. 아, 진짜 공연을 하긴 하는구나 하는 자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제까지 쌓아온 몇 시간이 담길 3분이라는 찰나가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감상들은 이후 이어진 리허설 순서에서 싸그리 무너졌다.


 연습 때도 안 하던 실수를 했다. 화음은 엉망이었고 틀리지 않던 박자까지 틀렸다.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를 부정하고 싶을 정도의 불안함이 들이닥쳤다.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손이 떨렸다. 다음 리허설 순서를 위해 마이크를 넘겨주는 순간까지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감각을 부여잡고 파트너분에게 양해를 구해 루프탑 구석에서 두어 번 정도 다시 화음을 맞춰봤다. 맞았다. 분명 맞았는데도 떨림이 가시지 않았다. 아무나 잡고 어떡하냐고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상태로 계속 음을 곱씹던 차에, 공연이 시작되었다.


 내가 참여하는 듀엣은 4번째 곡이었다. 곡이 전반적으로 잔잔한데, 앞뒤로 굉장히 신나는 곡이 위치해있어서 분위기를 잡기 어려운 순서였다. 게다가 멘붕 상태라니. 정말 서 있는 게 다일 정도로 기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주저앉을 순 없었다. 내 차례였으니까. 경쾌하게 곡을 끝낸 앞 순서 부원분에게서 마이크를 건네받고, 준비해온 멘트를 시작했다. 위축된 마음만큼이나 좁아진 시야에 그저 눈앞에 보이는 카메라를 응시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예상외로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연습을 많이 해서인지, 너무 충격을 받아 의연해져서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리곤 노래를 시작했다.


 초반부는 언제나 그랬듯 평화로웠다. 처연하리만큼 가라앉은 감정이 오히려 곡과 맞아떨어졌다. 파트너분의 단독 부분인 중반부도 그랬다. 하지만 화음 부분에 가까워져 올 수록 마음이 찌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어떡하지'라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던 순간, 연습에서 수없이 연습했던 부분의 간주가 들림과 함께 파트너분의 눈이 보였다. 우리가 연습 때 맞춰놨던 제스처 중 하나일 뿐이었던 그 시선에 순간 마음이 가라앉았다. 곡의 서사에 맞춘 연기였지만 그곳에 담긴 따뜻함에 뜻하지 않은 위안을 받았다. 그리곤 익숙한 화음이 들렸다. 우리가 몇 번이고 맞춰봤던, 귀에 박힐 정도로 연습했던 음이었다.


 그때의 감각이란. 안도감과 뿌듯함 등 오만가지의 행복한 감정이 뒤섞인 무언가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정말 내가 곡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그가 느낀 환희와 벅참을 맛봤다. 순서가 끝나고 퇴장하는 동안에도, 공연이 모두 끝나 공연장을 내려오는 동안에도, 심지어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온통 마음이 달았다. 첫 공연, 첫 연기, 첫 듀엣.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그 수많은 처음들이 행복과 함께 나에게로 왔다.


 내 생에 처음, 이라는 자취에 이렇게 좋은 기억이 찍혀있다는 걸 난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설령 잊더라도 잊지 못하리라 칭할 만한 또 다른 기억을 남긴 채 사라지겠지. 그렇게 하나 둘 쌓여 내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경험의 길을 만들어가겠지.


 삶이 지치고 힘들어도 또다시 새로운 시작을 맞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그 시작이 행복했다는 것에 한 번 더 감사한다. 이 처음이 나에게 안겨줄 수많은 행복과 불행을 기대하며 오늘의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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