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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Jul 12. 2021

51. 지각생의 근황

변명의여지없는

 정말 오랜만에 브런치를 켰다. 무슨 심경의 변화로 이제야 돌아왔냐 물으면 사실 할 말이 없다. 그냥. 문득 숙제처럼 글을 써오던 시간이 생각나서 다시 이곳을 찾았다. 돌아오지 않았다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잠수까지 탄 괘씸한 인간이 되었겠지. 솔직히 지각생의 이름을 달고서라도 다시 글을 쓰게 되어 조금 마음이 놓인다. 충분한 이유 없이 끝맺음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창피하고 속이 쓰린지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글이 올라오지 않던 시기에 난 종강을 했다. 정확히는 6월 19일에 마지막 과제인 소논문을 제출하고, 21일에 마지막 수업의 발표에 참여하는 것으로 1학기가 끝났다. 틈만 나면 시험과 과제를 이야깃거리로 볼멘소리를 했던 내게는 꽤나 의미 있는 날이었다. 마음속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 한 차례 종결되었음을 선언하고, 종일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만끽했으니까. 


 그다음엔 친구를 만났다. 청주에서 지내고 있는 친구였는데, 함께 호텔에서 1박을 잡고 서울 구경을 했다. 서울에 올라온 지 4개월 정도가 된 시점이었지만 오로지 '구경'이라는 목적으로 돌아다녀 본 건 나도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 새로운 장소도 갔겠다. 그렇게 둘 다 신난 나머지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쏘다니고 저녁 10시에 첫 끼니를 먹는 다이내믹한 여정을 보냈다. 결국 다음 날 컨디션 난조로 끝에는 우중충한 작별 인사를 해야 했지만 돌아보면 꽤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드디어 집에 다녀왔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다시 '왔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서글플 정도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왔다. 가만히 있을 때 피곤하거나 우울하지 않은 게 오랜만이라고 느꼈던 날은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지만 그런 충격도 잊어버릴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다. 바다를 보고 사진을 찍고, 가족들과 밥을 먹고 수다를 떨었다. 당장 밀려오는 행복이 두려울 정도로 행복했다. 


 넘치는 행복에 맞서 불안이 교차했다. 다음 순간에 대한 계획과 걱정 없이 하루를 산다는 것이 -그것이 내 성장에는 유해하리란 것을 직감하면서도- 얼마나 홀가분한 일인지. 내가 얼마나 요령 없이 살고 있었는지. 동시에 내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진짜 집이라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한  상념에 잠겼다. 물론 그땐 별생각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건 다 돌아오고 난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심을 담아 그때를 복기해 적어나가는 거니까. 사실과는 다를지도 모를 일이다.


 돌아와서는 아주 조금 바빠졌다. 새 룸메이트가 생겼고, 새로움에 적응하기 위해 바빠지는 것을 택했다. 최선을 다한다고는 못 하겠지만 공부도 시작했고 두어 달 전에 그만둔 운동도 다시 시작했다. 그림을 다시 그려볼 요량으로 중고 아이패드도 구매했다. 55만 원이라는 거금에 결재할 때는 손이 조금 떨렸지만 막상 손에 넣으니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오늘도 온종일 아이패드로 그림을 끼적이느라 정신이 없었을 정도다. 


 이 정도가 나의 근황이다. 확실히 학기 때보다는 훨씬 여유롭지만, 온전히 나의 의지로 하루를 재단해야 하는 시간을 살고 있다. 이건 내게 행운일까 시련일까. 그토록 바라던 것인데도 막상 마주하니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든다. 이건 벅차오른 마음의 설렘일까 깊은 수심의 두려움일까. 어느 쪽이던 살아봐야 알 수 있겠지. 


 글의 마지막에 닿기 9편 전,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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