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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Jun 14. 2021

50. 다육이

말라죽지 않았다는 의의

 사람을 식물에 비유하자면, 나는 한 달간 비를 맞지 못한 다육이 정도일 것 같다. 뿌리가 깊지 않아 멀리서 물을 끌어올 힘도 없고, 적에게서 나를 지킬 날카로운 가시 하나 없이 간간히 내려오는 비에 생을 의존하는 다육이. 스텝 지역의 긴 건기를 버티는 아이러니한 강인함은 잃어버린 채, 일 년 동안 건조하고 습하기를 이리저리 반복하는 혼란스러운 나라에 떨어진 다육이. 이 이상한 나라에, 나 대신 말라가는 다육식물 하나를 가져다 둬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겠구나 싶다. 그나 나나 메마르고 있다는 것은 매한가지니까.


 마지막 외출을 한 지 9일째. 블라인드를 내린 나의 호실은 운 좋게도 아직 나만의 방이다. 최근의 나는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다. 버거운 일이 있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우울에 잠겨도 난동을 피우지 않았다. 밀려오는 내일을 두려워하며 울먹이던 나는 어느덧 아무런 기도 없이 밤에 눈을 감는다.


 마지막 울분마저 증발한 머릿속은 고요하다. 잠깐씩은 정말 돌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멍하니 침대에 엎드려 노트북으로는 시사 프로그램 영상을 틀고 눈으로는 핸드폰의 화면을 훑는다. 무엇을 봤는지, 보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흘러가는 당장의 순간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지지만 않으면 그만이다. 시간이 찰나라는 것은 여전히 거북하고, 그 찰나가 공백이었다는 것은 여전히 속이 상하니까. 


 그나마 다행히도, 나는 지금에 만족하지 않는다. 둑이 무너진 것처럼 감정이 쏟아지던 때보다야 편안하지만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뭐랄까, 멍청해진 기분이다. 여간한 자극 없이는 반응도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게 더딘 촉각으로 다가온다. 순간의 거대한 쾌락 없이는 무료함을 떨쳐낼 수 없는 내가 보인다. 이 모습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저 무감각하다는 것. 창작을 하는 사람에게 무감하다는 표현은 얼마나 충격적인 선고인지. 스치는 바람 한 줄기에도 오만가지 생각을 했던 예전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또 무슨 복잡한 생각을 할까 싶다.


 ***


 시험과 과제가 서서히 끝나간다. 닥치면 닥치는 대로, 물러가면 물러가는 대로 살았던 내 20대도 절반 정도가 지났다. 많은 문제가 있는 시간이었다. 줏대 없이 시키는 걸 꾸역꾸역 하다 보니 어지러운 세상의 혼란스러운 장단에 휘말렸다. 그렇게 나는 슬퍼졌고, 우울해지다가 결국은 무감각해졌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새로운 일이 닥치면 완벽히 해내야 한다는 관습적인 강박에 짓눌렸다. 나약한 사람의 말로였다. 자기 줏대로 삶을 건설할 열정도, 꿈과 의무를 조율할 능력도 없어 세상에 휘둘리는데, 그 와중에 마냥 세상 탓을 하지도 못하는 나약한 사람.


 여름이 되었는데 비가 오지 않는다. 밖에서 내리는 빗물을 봐도 나는 건조하기만 하다. 온 세상이 우기여도 나 홀로 건기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리는 비로 인해 온 세상이 깨어나는 것 같았던 어린 날의 여름이 까마득하다. 나뭇잎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지나가는 차들의 불빛을 반사해 빛나던 빗줄기. 눅눅해진 공기의 냄새와 그 사이에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온갖 상념을 이어가던 나. 말라죽는다는 말의 의미 따윈 와닿지 않았던, 풍요롭다 못해 범람하는 감정 사이에서 몽상하던 그 시절의 찰나가 머릿속을 스친다. 


 낯선 타지에 떨어진 다육이. 뿌리를 뻗지도 못하고 하루를 살아내는데 급급했던 그는 요즘 많은 것을 망각한 듯하다. 혹독한 가뭄 사이에서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비를 기다리던 자신의 인내심도, 죽음의 땅이라 치부되던 곳에서 생명이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하던 스스로의 강인함도. 심지어는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가치 있다는 당연한 사실조차도. 단순히 생존을 위해 살아내는 것에 죄악감을 느껴온 지난 시간을 곱씹으며, 다만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절대로 죽지 않겠다고. 말라있는 자신에게 언젠가는 비가 내릴 걸 알기에, 마르되 죽지 않았다는 그 단순한 의의에 마음을 맡겨보겠다고. 천천히 말라가던 어느 날의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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