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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먹사남 Apr 11. 2022

배가 고파도, 마음이 허해도, 국밥

따뜻한 것으로 속을 채웁니다. 어떤 의미로든.

국밥을 즐겨먹는 편은 아니다. 식사를 할 때 반드시 국을 챙기는 것도 아니거니와, 아무래도 평소보다 과식을 하기 쉬운 탓이다. 뱃속을 두둑이 채우고 나면 그 포만감에 잠시 만족스럽지만, 잠시 후 쉬이 꺼지지 않는 배를 부여잡고 일을 하러 움직이려고 하면 세상만사가 그렇게 귀찮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마주하는 평생의 난제, '오늘 점심은 뭐 먹지?' 앞에서 매번 후보로 올라오는 것 또한 국밥. 심지어 찬 바람이 부는 계절에는 구수하고 진한 순대국밥을 한 그릇 할까, 칼칼하고 자극적인 뼈해장국을 후루룩 할까, 꼬들한 식감과 쿰쿰한 향이 일품인 소머리국밥을 와구와구 퍼먹을까, 시원하고 뜨끈한 콩나물국밥을 한 뚝배기 들이킬까 고민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나 하나뿐인 것은 아니다 보니 소위 '국밥충'이니 하는 소리까지 나오는 것이겠지.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다만.


지치고 힘든 날에는 국밥


업무의 특성(강사+영업직+자영업자)상 오래 서 있고 많이 걷게 되는 편이다. 평균적으로 1만 걸음은 기본, 바쁜 날에는 2만 걸음도 우습다. 이런 생활을 15년 이상 하고 있으니 사실 지구력은 나쁘지 않은 편이고, 평소처럼 일을 마치고 나면 조금 나른할 뿐이다. 자고 일어나면 어제와 다름없는 활동을 이어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에너지 고갈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평소와 같은 어느 날, 아주 뜬금없이 몸이 축축 늘어지고 일할 의욕이 사라진다. 일터에 나섰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되어 사무실 의자 등받이에 깊이 파묻고 늘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열한 시 정도가 되면 평소와 다른 수준의 허기를 느끼면서, '뭔가 좀 든든하게 먹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날에는 십중팔구 순대국밥이다. 평소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는 '특'으로 주문한다. '특'이라고 해 봐야 천 원 차이인데, 바글바글 끓는 뚝배기 안에 그득한 고기의 양을 보면 먹기 전부터 흡족한 기분이 될 정도라서.


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맛을 본 다음, 그날의 기분에 따라 소금으로 간을 맞추기도 하고 새우젓을 넣고 휘휘 저어 감칠맛을 더하기도 한다. 소금으로 간을 맞추면 국물 뒷맛이 깔끔해서 좋고, 새우젓으로 간을 하면 순댓국 맛이 더 진해지는 것 같아 만족스럽다. 둘 다 동시에 넣는 선택지는 없다. 이도 저도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밥을 뚝배기에 풍덩 빠뜨리는 것도 좋겠지만, 시작은 따로국밥이다. 순대는 앞접시에 미리 덜어놓고 살짝 식혀두자. 밥을 한술 뜬 다음에 순대를 집어 반찬삼아 먹어도 좋고, 순대 전용의 소금이 있다면 콕 찍어 먹어도 맛있다. 가끔 쌈장을 살짝 얹어 먹을 때도 있는데, 국물에 녹아있는 고기 향 덕분인지 잘 어울린다. 고기는 당연히 새우젓에 찍어 먹는 게 국룰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냥 먹는다고 해서 그 풍미가 어디로 가지는 않으니 마음대로 먹는 편.


밥도 건더기도 절반쯤 먹고 나면 그제야 밥을 말아서 슬슬 휘젓는다. 밥도 한 김 빠지고 국물도 적당히 식어서 후루룩 떠먹기 좋은 상태. 그래도 조금 더 휘저어 밥알의 찰기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기와 함께 양껏 떠서 먹는다. 반찬은 좋아하는 것으로 취향껏. 나는 개인적으로 오징어나 낙지 젓갈을 주는 가게가 좋았다.


일부러 찾아와 먹는 국밥이니만큼 일의 시급성 따위는 깊이 생각 않고 천천히 꼭꼭 씹어서 뱃속에 차곡차곡 쌓는 느낌으로 먹는다. 이런 가게에는 으레 사장님 취향의 TV 채널이 틀어져 있으니 그것도 봐 가면서 쉬는 기분으로 오후를 넘길 에너지를 모은다. 뚝배기 바닥을 몇 번 긁는 소리가 나면 비로소 '한 그릇 뚝딱 했으니 돌아가 볼까' 하는 기분이 드는데, 오전의 무기력함은 온데간데없다. 물론 일을 열심히 하고 싶어 졌다는 말은 아니지만.


기분이 별로인 날에도, 가끔은 국밥


혼밥, 혼술이 익숙하다. 먼 거리를 이동해 일을 할 때가 많다 보니 애매한 시간에 식사를 해야 할 때가 많아서, 점심 같이 먹을 사람을 찾지 않게 된 지 벌써 4년째.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만 골라하다 보니, 프리랜서 짬과 함께 나 홀로 먹고 마시는 내공도 늘었다.


프리랜서는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달리 '프리한' 직업이 아니어서, 출근도 퇴근도 없는 일상이 계속 이어진다. 예상치 못한 문제에 부딪혀 허덕일 때면 믿을만한 동료 한 명이 그렇게 절실할 수 없고,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면 퇴근 후 소주 한 잔에 하소연 들어주던 부장 놈까지 그립다.


같이 저녁 먹어 줄 친구를 찾아갈 수도 있고, 겸사겸사 한 잔 기울여도 좋겠지만, 갑작스레 연락해 '내 얘기 좀 들어줘' 할 나이도 아닌지라, 결국은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나 홀로 식도락이 늘었다. 동네 배달음식을 섭렵한 이후로는 출장지의 맛집을 훑고 다니고, 이삼일에 한 번은 들르는 서울 방방곡곡의 먹거리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통장 잔고 고갈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오늘도 열심히 일한 나를 위해 보상을 해야겠는데, 카드는 쓸 만큼 썼고, 통장에 돈은 있지만 앞으로 돈 나갈 곳이 많이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술도 한 잔 고픈데, 치킨 한 마리, 야채곱창 한 접시 가격이 부담되는 순간이 올 때가 있다. 아는 사람은 안다. 단 돈 몇 천원이 아까워서 먹지 못하는 상황이 얼마나 서러운지.


이런 날에는 뼈해장국이 좋다. 혹은 콩나물국밥. 자극적인 것 또는 개운한 것을 앞에 두고, 밥 한술 퍼서 위장을 안정시킨 다음에 "이모, 소주 한 병!" 하는 거다. '뜨다닥'하는 경쾌한 소리, '꼴꼴꼴' 한 잔 따라서 '캬아' 한 번 해 주고, 칼칼한 국물을 한 모금 넘기면, 아직 열기가 뜨끈한 해장국이 식도를 긁고 내려가면서 소주의 불쾌한 뒷맛을 싹 지워준다. 그리고 또 한 잔, 또 한 잔.


혼술이니까 석 잔 정도는 얼른 마셔서 취기를 올려놓고, 살짝 식은 뼈를 건져서 젓가락과 숟가락으로 슬슬 긁어준다. 야들야들한 살코기가 툭툭 떨어져 나오면, 겨자를 푼 소스에 콕 찍어서 한 입. 뭔가 조금 더 씹고 싶다면 밥과 김치를 곁들여서 또 한 입. 살밥이 실한 뼈를 긁어내고 있으면 투둑 떨어져 나오는 고기와 함께 마음 한편에 쌓인 애매한 기분도 함께 떨궈지는 기분이다. 아, 뚝배기에서 숨이 푹 죽은 우거지를 잊으면 안 된다. 국밥 속 우거지는 가끔 고기보다 맛있을 때가 있으니,  이건 이미 우거지가 아닌 다른 무언가다.


그렇게 뼈를 긁어 마음속을 청소하고, 술 한 잔에 찌꺼기를 씻어내길 몇 번 하고 나면 뱃속에 뜨뜻한 포만감이 차오른다. 그게 술기운인지 국밥인지는 별로 상관은 없다. 치킨값 조금 안 되는 돈에 배도 부르고 기부니도 조크든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식사를 꼽으라면 국밥은 반드시 한 손안에 들어갈 것 같다. 종류는 좀 많은가. 내 최애는 단연 순대국밥, 뼈해장국, 콩나물국밥이지만, 직장인의 오랜 친구 갈비탕, 심심한 설렁탕, 몸에 좋은 곰탕, 돼지 부산물이 매력적인 돼지국밥, 야들야들 선지해장국...... 사람 취향 따라 호불호는 갈려도, 하나같이 밥 말아먹기 좋은 국물에 술 한잔 걸친대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음식이다. 심지어 값도 싸고.


한동안 '그 돈이면 국밥이 몇 그릇인데!' 같은 소리가 일종의 밈이 되어 우리 귓가를 맴돌았었다. 대부분 이 밈이 우습다 여겼지만 생각보다 이 밈의 생명이 길었던 것은, 누구나 뜨끈한 국밥으로 계절 가리지 않고 뱃속의 허기를 만족스럽게 채워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 터다. 그리고 그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뚝배기 속 뜨끈한 국물에, 그 열기에, 텅텅 비어버린 위장만 위로하고 말았던 것은 아니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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