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살다] 그리고 독서...
올해는 9월부터 유난히 바빴다. 어쩌다 보니 한국 출장을 두 번이나 다녀왔고, 그 사이 캐나다 여행과 출장도 한 번씩 다녀왔다. 그리고 작년에는 오라고 노래를 불러도 오지 않던 친구들이 여럿 다녀갔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건 상관없지만 나는 스스로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는 점점 기가 빨려나가 방전이 되는 경우가 잦다. 그러다 환절기에 크게 그리고 오래 아프기도 한다. 12월 초에 한국에 다녀온 이후로 한번 크게 앓았다. 컨디션은 떨어지는데 쉬지 못하는 하루하루에 회사는 나가야 했고, 출장으로 미뤄뒀던 일들에 치여서 퇴근을 늦게 했다. 결국 탈이 났고... 중간중간에 최선을 다해서 쉬면서 오늘에야 겨우 조금 멀쩡해진 것 같은 기분이다.
금요일 밤에 퇴근을 하고서는 문득 일 년이 넘게 북쪽에 머리를 두고 잠이 들었다는 걸 알게 됐고, 그런 걸 믿는 건 아니지만 괜히 밤잠을 설친 것도 같은 기분에 나침반을 켜고 침대를 이리저리 돌리다 마음에 드는 위치를 잡았다. 진작 이렇게 해놓고 살걸... 다른 걸 떠나서 구조적으로 가장 편한 위치를 찾았다.
오랜만에 이틀을 쉬었다. 어제는 알람을 맞추지 않은 채로 적당히 일어나서 아침부터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넷플릭스를 보다가 낮잠을 내내 자고 일어나서는 다시 빨래를 개고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 최선을 다해서 에너지를 아꼈더니 오늘은 조금 살만해졌다.
오늘 역시 알람을 맞추지 않았는데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밝은 빛에 잠이 깼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기적... 밍기적을 행한 후에 일어나서는 거실로 나왔다. 눈곱도 떼지 않고 안경도 쓰지 않은 채다. 쉬는 날 아침의 일종의 의식 같은 일인 커피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였다. 커피 빈을 정성스레 갈고 뜨겁게 커피를 내렸다. 티브이를 틀자니 무언가 소란스러운 느낌일까 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몇 달 전부터 협탁에 놓아두었던 책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독서를...
an Box(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
예전 독서모임을 할 때 멤버님께 추천을 받았던 책으로 한국에서도 읽지 않았고, 어떻게 이삿짐에 고이고이 흘러들어 온 책인데 결국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읽지 않았던 책이다. 우연히 오늘 적당히 얇은 책을 '다' 읽고 싶은 마음에 선택을 했다. 책 속에 나오는 것처럼 여자가 남자들에게 추천하는 가벼운... 내용의 GD(Gender Issue) 책이라고 알고 샀었더랬다. 내 성향상 서점에서 이런저런 책을 찾다가 절대로 사지 않을 책의 하나였을 것 같은 그런 책이다.
맨 박스에 나오는 남자다움... 또래집단 사이에서의 지위를 위한 어떠한 행동들... 사실 언젠가부터 나는 '남자'인 친구들이 별로 없다. 남자 셋만 모이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나오는 이야기는 결국 여자 이야기... 여자 이야기 그리고 여자 이야기... 요즘은 내가 나이가 조금 있다 보니 무슨 이야기를 하든 결국 돌아오는 건 내 연애 그리고 결혼 이야기... 급해도 내가 급할 거고, 만나도 내가 만날 텐데 다들 왜 그렇게 안달인지...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 그림, 음악 내가 좋아하는 연극, 뮤지컬 내가 좋아하는 커피, 맥주, 와인, 위스키 내가 좋아하는 빵을 만드는 방법, 쉬는 날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요리는 어떻게 하는지... 내가 좋아하는... 등등등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사실상 불가능하다. 일반적인 남자들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별종인 사람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가 '남자'인 친구들이 잘 없고 쉽지 않다. 이런 전형적인 맨 박스에 갇혀 있지는 않았지만... 결국 기득권의 편안함은 당연한 것처럼 누리고 있었던 것은 또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전형적인 말 그대로 맨 박스에 갇힌 스스로를 '착한' 남자라고 생각하는 부류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불의를 보거나 듣더라도 그건 '나쁜' 남자들의 일탈인 것처럼 입으로만 바른 소리로 주절주절 대는 그 정도... 알지만 나서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오랜 시간 만들어진 맨 박스 속에서 편안함 혹은 기득권을 누리고 살고 있었다. 세상에 또라이는 많으니까... 나는... 나만 그러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면서 살아왔다.
어렸을 때 나는 남중, 남고를 나왔다. 남자들만 있다고 GD 이슈가 없느냐... 는 아닌 것 같다. 그때는 인지하지 못했던 장난들... 어디에나 언제나 힘이 있는 그리고 힘이 없는 친구들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폭력, 불합리함 그리고 부적절함이 인지되었다 하더라도 그때의 '나'는 용기가 없었고, 나약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아닌 척... 나만 아니면 되니까... 애써 눈을 돌리고, 그렇게 합리화를 하면서 커왔던 것 같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없이 살아가던 때였다. 어떤 형태의 폭력이든, 원인이 어디 있든지 간에 폭력은 피해자의 문제가 아닌 가해자의 문제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평상시에 쉽게 쉽게 해왔던 말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말들도 별거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대상을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책 속 '존의 이야기'처럼 잘못된 점을 깨달았다고 바로 내가 행동에 옮길 수 있느냐... 나라는 사람의 인간형을 구분하자면 회피형의 최고봉에 위치해 있는 것 같다. 뭔가 힘들거나 처리해야 하는 일이지만 내 깜냥을 넘어선다 싶으면 회피해 버리기 일쑤였다. 뭔가 불치병 같은데... 노력은 하고 있다. 당장은 어렵더라도 박스를 점점 넓히는 그리고 언젠가는 박스를 넘어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조금 더 나을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책을 읽는 동안 뜨거운 커피는 차갑게 식었고, 어느새 훌쩍 몇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점심때가 되었다.
점심을 해 먹고 냉장고를 보니 텅텅 비어있다(물론 맥주가 없다는 뜻이다). 한동안 아픈 상태라 맥주에 신경을 못 썼더니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냉장고에 맥주 칸이 비어있었다. 결국 차를 달려 왕복 두 시간 만에 맥주를 사 왔고, 냉장고에 정성스레 넣어두면서 뿌듯함? 혹은 곳간에 식량을 채워 둔 듯 풍요로움을 느꼈다. 이게 뭐라고...(어느 칸이 진짜 맥주일까?)
오래간만에 몸과 간이 정상적인 상태인 기념으로 맥주를 마시면서 이렇게 글을 써본다. 주저리주저리... 요즘은 집에서 절친 Alexa랑만 대화를 하고 있는데 내 말을 잘 못 알아 들어서 가끔 시원하게 수다를 떨고 싶을 때가 있지만 결국 전화를 걸 마땅한 곳이 없어서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글을 남겨본다. 겨울밤은 참 길고 길다.
2019. 12. 29
Happy Holid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