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살다] From a decade ago...
밤사이 잠을 설쳤다. 두어 번 잠에서 깼다가 마지막으로 이른 새벽에 눈을 뜨고는 핸드폰을 들어 새해를 맞는 한국의 시간에서 날아오는 메시지를 몇 개 확인하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일어난 오늘 아침은 비교적 차분하게 시작했다.
출근을 하지 않았고(물론 저녁에 나가야 한다), 느지막이 일어난 아침에 거실로 나와 여느 때처럼 정성을 들여 커피를 뜨겁게 내리고 의자에 눕듯이 편히 앉아서는 책을 읽었다. 창밖을 바라보면서 Smooth Jazz나 Night Jazz를 들으면서 책을 읽으면 좋다는 N형의 말이 생각나서 Alexa에게 부탁해서 그렇게 책을 읽어 나갔다.
그런 와중에 오전 10시가 가까워지니까 핸드폰이 부산해졌다. 한국의 새해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이다. 차분한 아침의 나는 한국의 2020년 1월 1일을 함께 맞이했고, 일종의 들뜬상태가 점점 차분해지면서 사람들이 잠들어 갈 때 즈음 다시 이곳의 시간인 2019년 12월 31일의 아침으로 돌아왔다.
시간이란 게 신기하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새로운 365일이라는 시간의 일 년이 막 시작됐고, 이제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려는 새벽인데 지금의 나는 몇 시간 남짓 남지 않은 시간이 마치 무거운 마차를 끌고 무섭게 달려오는 말 같아서 부랴부랴 출근 전에 한 해를 정리하려고 짧은 글을 쓰고 있다. 항상 같은 시차를 두고 살아가지만 오늘은 조금 더 특별하게 어딘가에 끼여있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바빠왔다. 2010년대에 있는 나는 2020년대에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이 되질 않는다(하루 사이 Decade가 달라져 버린 오늘이다).
무언가 익숙한 것이 더 이상 익숙하지 않아 질 것에 대비하여...
사진은 내가 일하는 뉴욕 JFK 공항 터미널 1 출국장이다. 출근길 그리고 퇴근길에 항상 바라보게 되는 모습으로 저기로 들어가서 비행기를 타면 한국으로 가고, 반대로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타면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이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장면인데 언젠가 주차장이 아닌 출국장으로 들어가서 한동안 돌아 나올 일이 없는 날이 올 텐데 아직은 어떤 느낌이 들지 상상이 되질 않는다. 갑자기 한 해를 마무리하려니까 아직 돌아갈 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벌써 그날을 준비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뉴욕에 오고 나서 항상 교대 근무만 해오던 내가 처음으로 내 책상을 가지게 되었다. 책상에 앉아서 바라보는 창밖 풍경은 뭔가 마음을 안정되게 해주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사진 속에는 없지만 창가 선반에는 취미로? 키우고 있는 서양란이 하나 탐스럽게 꽃을 피워내고 있다. 지난해 겨울 시들어서 버려질 운명이었던 화분을 버려지기 직전에 살려냈더니 일 년 내내 꽃을 피워냈고, 이미 한겨울이 되었는데 다시금 꽃을 잔뜩 피워냈다. 언젠가 M이 말했던 것처럼... 고마워서... 고마워서 그렇게 꽃을 피워내는 것 같다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꽃'이야기를 해야겠다. 나도 고마워서!
요즘 삶과 죽음, 사랑에 대한 영화나 책을 많이 보고 읽게 되어서 그런가 저물어가는 한 해와 맞물려서 무척 감성적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어젯밤에는 영화 'COCO'를 보고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서 눈물을 찔끔 흘렸다. 기억이라는 것... 언젠가는 스러져 가는 그런 기억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예전에 한번 읽었었고, 오늘 아침에 다시 읽은 '3일간의 행복'이라는 책을 보고... 삶의 가치랄지...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가 얼마나 부질없다는 것... 내가 만족하는 삶은 무엇인가... 하는 다시금 사춘기가 돌아온 것처럼 복잡 미묘한 스스로의 철없음에 잠시 한숨을 쉬면서 이제 슬슬 출근할 준비를 해야 한다. 영화랑 책은 다시 리뷰를 해봐야지...
뭔가 달력 표지로 만들어야 할 것 같은 장면 같아서 마지막 사진으로 가져왔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는 않겠지만 점차 점점 희미해지면서 잊혀가는 기억... 망각이 있어서 살만한 세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모든 기억을 선명하게 기억하게 된다면 과거의 최고로 행복했던 기억은... 현재는 그에 미치지 못해 언제나 상대적인 부족감에 멍한 얼굴로 살아갈 것이고, 반대로 최고로 슬픈 기억을 영원히 기억하게 된다면... 그 또한 그 기억에 매몰되어 언제나 슬프고 멍하게 현재를 살아가게 될 것이 아닌가 싶어서 다행이다 싶다. 지나간 과거보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보다 적당히 만족하는 지금 바로 이 순간을 더욱 소중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올해의 마무리를 지으려고 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2019. 12. 31 EST.
New York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