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작가의 <식물적 낙관>을 읽은 후의 단상
“식물을 통해 내가 얻은 가장 좋은 마음도 그런 안도였다. 우리와 가까운 곳에서 식물들이 피고 지는 숱한 반복을 하며 가르쳐주는 것은 뭐 그리 대단한 경탄이나 미적 수사들이 아니라 공기와 물, 빛으로 만들어낸 부드럽고 단순한 형태의 삶의 지속이었다.”
-김금희, <식물적 낙관> 중-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돌본다는 행위는 의식적인 행동 가운데 무의식적으로 나의 삶을 나아지게 만들고 통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고귀하다고 생각한다. 그 대상이 같은 종인 인간일 때도 그러하지만 특히나 다른 종의 생명체를 돌볼 때는 그 행위가 좀 더 특별해지는 것 같다. 푸바오와 강바오(판다 사육사의 애칭)의 관계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서로가 언어의 장벽을 넘는 특별한 교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금희 작가는 <식물적 낙관>에서 식물과의 교감이 그녀에게 안도감을 준다고 이야기한다. 그 안도감은 아마도 나의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어떤 에너지이지 않을까. 나에게도 그런 에너지를 주는 존재가 있다. 우리 집의 노오란 털뭉치, 고양이 광복이다.
2019년 8월 15일. 광복이를 만난 건 한남동의 작은 와인바였다. 당시 남자친구, 지금의 남편이 광복절 휴일을 맞아 데리고 간 곳이었다. 그 때 우리는 결혼 전 동거를 할 때였는데, 둘 다 강아지를 너무 좋아하지만 각자의 일 때문에 강아지를 키울 수 없는 현실에 개탄하고 있었다. 우리가 강아지를 키운다면 은퇴 후가 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반려동물을 꼭 키우고 싶다, 그렇다면 고양이는 어떨까 하며 자연스럽게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여러 고양이의 사진을 보며 연신 ‘너무 귀엽다’고 감탄하고 있었다.
그 때, 우리 테이블 쪽으로 작고 노오란 무언가가 다가왔다. 세상에! 고양이야! 나는 너무 놀라 소리쳤고, 남편은 쉿-조용히 하라며 주의를 줬다.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다가오더니 우리 테이블 밑에 자리를 잡고 빠안히 나를 바라보는 광복이와 눈이 마주쳐버렸고, 나는 우리 음식에 있던 닭고기를 조금 떼어 물에 씻어 내밀었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먹던 광복. 허겁지겁 잘도 받아먹는 것이 어찌나 예쁘던지..!
“앗, 콩이야! 나와!”
사장님은 우리에게 죄송하다며 콩이를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괜찮아요, 저희 고양이 좋아해요.”
“얘가 이렇게 손님들 테이블에 가는 애가 아니었는데, 신기하네요.”
나는 아마도 그 때 이미 광복이를 데려오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아이의 이름은 ‘콩이’. 길고양이고, 사장님 본인이 키우는 건 아닌데 가게에 일하러 오면 밥을 챙겨주고 계셨다. 사장님은 너무 예뻐서 자신이 키우고 싶은데 그럴 형편이 안되어서 아쉽다고 했다.
“사장님 그러면, 제가 데려가도 괜찮을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무모했던 결정이었지만, 그 무모한 결정으로 인해 그날 이후로 ‘콩이’는 광복이가 되었고 우리 가족이 되었다.
8월 15일 광복절에 만나게 되어 광복이란 이름을 갖게 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먹는 것, 꿩깃털 장난감, 아침의 일광욕, 그리고 엄마.
광복이는 내가 누워있을 때나, 요가를 할 때나, 요리를 할 때나, 책을 읽거나, TV를 볼 때나, 심지어.. 화장실을 갈 때도 내 곁에 있어준다. 단지 가만히 내 옆에 존재할 뿐인데, 그 존재 자체가 희한하게도 나에겐 큰 위로와 안도감을 준다. 꼼지락 거리는 손(꾹꾹이), 자그마한 체구의 볼록한 배가 위로 아래로 움직이는 모습, 그르릉거리는 소리. 특히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눈키스를 해줄 때, 그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없다.
내가 광복이에게 해주는 것은 매일 똑같이 사료를 챙겨주고, 간식을 주고, 화장실을 치워주고, 사냥놀이를 하고, 시원하고 깨끗한 물을 공급해주는 일. 이러한 돌봄을 받는 광복이의 하루는 특별할 것이 없다. 하지만 그녀의 ‘단순한 형태의 삶의 지속’이 복잡한 나날의 연속인 나에게 더할나위 없는 위로를 준다. 안도감을 준다. 고양이의 삶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복잡하게 생각됐던 일들도 단순해진달까. 다시 본질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일상을 다시 이어갈 수 있는 힘을 준다. 내가 분명 너를 돌보고 있는데, 내가 너에게 돌봄을 받는다. 돌봄의 대상이 나의 삶을 일으키는 이 아이러니한 교감은 내 마음에 풍요를 가져다 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무릎에 앉아 나를 올려다보는 광복과 함께 글을 쓰고 있다.
곧 이사를 가는데, 냥집사에 이어 식집사에도 도전할 예정이다. 마음의 풍요가 조금 더 풍성해지기를.
p.s. 우리집에는 두 마리의 냥이가 있다. 광복과 꼬비. 똥꼬발랄 꼬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