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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나 May 07. 2023

1. 전업주부? 난 그거 안 할 줄 알았지.

나는 90년생 주부다.


아이를 낳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을 손에서 놓은 7년 동안은 고스란히 집안일과 육아를 전담했던 전업주부였다.

지금은 아들 둘을 키우며, 파트타임으로 작은 경력을 살리며, 또 살림을 하며, 그렇게 살고 있다.


90년생이라 함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모두 경험한, 문화의 혜택을 크게 받은 세대이다.

대학교육까지 받은 이들이 부지기수고, 자라면서 남녀평등의 혜택을 받기 시작했던 세대이기도 하다.

그런 배경 때문일까. 나는 학교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을 졸업하면 사회에 이바지하는 유능한 인재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혼하여 현모양처가 되겠다는 꿈은 일절 꾼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살림이나 요리 같은 분야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교육도 받아본 적 없던 내가 전업주부가 되었을 때, 그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결혼생활과 전업주부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부해서 사회에 이바지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말은 들었을지언정,  전업주부가 되어 무엇을 훌륭히 해낼 수 있는지, 어떤 목표를 세워 일을 해야 하는지, 일과 쉼의 분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해 주는 사람도, 그런 책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게다가 전업주부라고 하면, 사회에서 만연하게 느껴지는 잘못된 이미지도 있었지 않은가.

남편의 월급을 받아 생활하고, 멋진 커리어우먼과는 다르게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집안일을 하는 후줄근한 그런 모습.


사실 이러한 이유들로, 나는 전업주부이면서 동시에 전업주부를 탈출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는 취준생이었던 시절이 꽤나 길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었고, 경력직 군무원 시험도 쳤다. 거의 4-5년은 직장을 찾기 위한 도전들로 전업주부로서의 일은 거의 내팽개쳤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이를 키우고 밥도 먹고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살림을 하긴 했지만, 잘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고 어쩔 수 없이 꼭 해야 하는 일만 꾸역꾸역 간신히 했던 것 같다.


이런 상태이다 보니, 전업주부 취준생으로 있는 동안은 내가 놓친 것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공부할 시간을 빼앗는 아이의 울음소리, 직장에서 인정받으며 쌓아 올렸던 이력들이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순간들, 육아와 공부를 병행하며 얻은 마음의 병들(신경성 불안증세가 있었다), 일을 하지 않은 덕에 아무런 이력도 남기지 못하고 날려버린 내 20대, 이러한 이유들로 낮아진 자존감 등등.

지금은, 그때의 낮아진 자존감과 불안한 마음이 전업주부였던 내 상황이 아니라 나의 좁은 시야와 급한 마음 때문이었음을 안다.

‘나는 이런 <무직> 상태에 머무를 사람이 아니다,라는 자만과 편견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원동력이라기보다는 채찍질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나는 그 편견에 사로잡혀 무쓸모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전업주부는 하는 일 없이 집에 있는 사람이라는 못된 편견은 도대체 어떻게 심긴 것이었을까.


역설적이게도 나는 계획에 없던 둘째 아이를 만나게 되면서 한층 더 나아진 삶을 살 수 있게 됐다.

출산과 아이 둘의 육아가 직면한 과제로 다가오자, 취업공부는 물 건너갔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내려놓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첫째 아이가 만 2년 가까이 매일 새벽 세 번 정도는 일어났기에 분유를 먹이고 트림도 시키고 여차하면 놀아주기까지 해야 하는, 잠 문제에 매우 까다로운 아이였다.

(밤을 그렇게 보내고 아이가 낮잠을 잘 때 커피를 들이부으며 공부를 하려고 했으니, 몸도 정신도 건강하지 못했던 게 당연했다.)

첫째 아이를 키우며 잠다운 잠을 자 본 적이 없었는데,  둘째 아이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걸 또 해야 한다는 생각에 엄청난 좌절감이 몰려왔고 공부는 완전히 놓아버렸던 것이다.


손에 쥔 것을 놓아야 다른 것을 잡을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그렇게 손에 쥔 전업주부 탈출의 욕심을 내려놓고 주부로서, 아이 엄마로서 내 삶을 감사히 여길 수 있게 되는 기회를 얻었다.

내가 엄마로서 본분에 충실해야 할 때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자, 아이가 더 이상 거추장스럽게 느껴지지 않기 시작했다.


전업주부의 바지런한 노동이, 너와 내 삶을 잘 다질 수 있는 양질의 토양이라는 것,

내가 오늘 너에게 먹이는 따뜻한 밥 한 그릇이 네가 어른이 되어 힘이 들 때 너를 토닥여 줄 사랑이라는 것,

우리가 햇볕냄새나는 침구에 몸을 누일 수 있는 깨끗한 공간이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 줄 너그러운 마음이 되어준다는 것,

이렇게 매일 쌓아가는 작은 노동들의 값은 어떤 비용보다도 비싼 값에 매겨진다는 사실을 너무나 늦게 알았다.

내가 엄마라는 사실이, 주부라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둘째 아이를 낳고 얼굴이 더 피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다.

아마도 주부의 삶을 벗어나라고 때리던 그 채찍이 없기 때문이겠고, 더 이상은 엄마와 주부라는 사실로 마음이 피폐해지지 않기 때문이겠거니 생각한다.


엄마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엄마가 되기로 결정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자아가 강한 사람이면 강한 사람일수록 더 하다.

나는 자그마치 5년 동안 그 일을 해내지 못해 지옥에서 살았다.

엄마로서의 삶도 충분히 즐겁고 좋다는 걸 배우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사회구성원으로서 엄마의 역할을 몰랐기 때문이었을까.


지금의 삶에 감사하는 법을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리 마음속이 지옥이지는 않았을 텐데.

내 아이들에게는 내가 지금에서야 안 것들을 일찍부터 알게 해주고 싶다.


어떤 삶이라도 감사하는 법, 어떻게 살아도 삶에는 작은 행복들이 숨어있다는 것,

내 발전뿐 아니라 남의 행복을 심어주는 일에 내 행복도 딸려간다는 것. 그런 것들을 말이다.


워낙 성격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다 보니, 지금도 주부 외에 여러 가지를 하고 있기는 하다.

작은 일도 하고 있고 여러 가지 사이드 프로젝트들도 하고 있고.

그렇지만 주부로서 삶을 인정하지 못해 채찍질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더 나은 가족의 삶을 위해 움직이는 톱니바퀴 같은 것들이랄까.


그런 90년생 엄마, 주부의 기록을 내 작은 온라인의 일기장에 남겨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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