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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이 May 19. 2023

J에게

J는 독특했다.

내가 이직해 오고 얼마 안 있어 퇴사한 직원이라 대화는 별로 못 나눴다. 하지만 그녀의 독특한 업무 스타일은 기억난다.


J의 업무 중에는 직원들로부터 무언가 신청을 받아 처리해 주는 업무가 있었다. 독특한 점은 그녀가 본인의 업무시간대를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는 거다. 즉, 어떤 직원이 오후에 전화해서는 저 이것 좀 처리 부탁드립니다... 해도, "그 일은 오전 9시부터 11시 사이에만 신청받습니다. 내일 아침에 문의 주세요" 라며 접수를 거절했다. 그 때문에 제법 욕을 먹었는데도 절대 굽히지 않았다.


다른 팀원들도, 나도, 그녀가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그럼 개인사업을 할 일이지, 직장인이 자기 마음대로 시간을 정하는 게 어딨어. 오후에 연락 오면 일단 접수라도 해서, 내일 처리되니까 양해 부탁드린다든가 말로라도 때우고, 내일 아침에 처리하면 될 것을. 거 융통성 없는 사람일세‘

J는 순환근무 방침에 따라 타 부서로 이동했고 몇 개월 안 되어 퇴사했다.


십수 년이 흘러, 나는 부장이 되었고 일에 치여 고단과 환멸이 몰아칠 때면 가끔 J를 떠올린다. 그녀는 그때 무슨 심경이었을까. 욕을 먹더라도 업무를 그렇게 처리한 게 꼭 독특해서였을까.


어쩌면 그녀는 타임 매니지먼트를 잘하는 사람이었겠다. 그녀는 마치 사업가처럼 회사 일도 자기 사업처럼 경영했던 것일 수 있다. 요즘 트렌드에, 그건 욕먹을 일이 아니라 자기주도적으로 일한다고 칭찬해야 할지도 몰라.

아니, 그보다 어쩌면, 자기주도적 업무처리 따위가 아니라, 살기 위한 생존본능이었겠다. 하루 내내 접수처리에 시달리게 되면, 하루가 다 망가지고 다른 업무들이 밀려 야근에 허덕였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그녀는 구조적인 문제의 희생양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회사 직원수가 1천명대에서 2천명대로 1년 만에 급성장했는데, 2배로 늘어난 직원들을 상대로 하는 담당자의 업무량은 조정되지 않았다. 조직은 그렇게 작동한다. 퀄리티가 낮다고 생각되는 업무는 인력 투입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난이도가 낮다고 생각되는 업무는 ‘막내급 1명’이 이런저런 일들을 배워가며 할 일이라 생각하고, 그 업무만을 위해 2명을 배치하지는 않는다. 업무를 자동화하는 과정 자체에도 인력이 필요하지만, 그건 그냥 담당자가 일은 일대로 하면서 자동화도 알아서 해내기를 바랄 뿐이지 적절한 지원을 해주지 않는다.


부조리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부조리하다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구조. 한국 기업의 조폭문화 구조에서 ‘일이 많으니 줄여주세요, 아니면 사람을 더 뽑아주세요’라는 말도 못 꺼낼, 서열 끝자락에 있는 J가 취할 수 있었던 방법은, 욕을 먹더라도 시간을 통제하는 방법뿐이었겠다.


J를 이상한 직원으로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한다.

어떤 시즌은 매일 밤 11시~12시에 퇴근한다. 일을 마쳐서 퇴근하는 게 아니라 지금 하든, 내일 하든 별 차이가 없어서 막차가 끊기기 전에 나서는 것뿐이다. 그냥 일주일을 통으로 월요일 출근해서 금요일 밤에 퇴근하는 기분이 들 때면, 나도 J처럼 시간대를 구분해서 창구를 운영하고 싶다. 나는 다만, 부장이라는 이상한 책임감으로, 또는 내게 일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주로 고위임원들이라는 이유로, ‘Closed’를 내걸지 못한다. 난 욕먹는 걸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사람들은 J가 부서의 권한을 등에 업고 갑질을 한다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녀는, 부서사람들이 기피하는 대직원 창구 업무를 맡은 고졸 입사 여성, 직장 내 을중의 을의 위치에서, 힘들게 매일을 싸워내야 했던 것 같다.


"나는 이 일을 9시부터 11시까지 2시간만 처리할 거야"라는 건 요즘 듣기 좋은 "셀프 매니지먼트" 자기주도적 선언이 아니라, 숨이 목까지 차 허덕이며 외쳤던 단말마의 비명이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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