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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이 May 23. 2023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지민이 친구 OOO입니다. 제가 통화시간이 안 날 것 같아 문자 드립니다. 상담받고자 하는 이유는 밑에 붙여 넣었습니다.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외부 상담 업체에 신청하려고 썼던 내용인데 업체가 회사에 공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취소했습니다. 그때 쓴 내용 그대로 복붙 할게요. 그 많은 심경을 글로 적는 데 한계가 있네요. 모르는 사람이 읽으면 그냥 번아웃이네, 이렇게 쉽게 생각할까 싶어서 조금 씁쓸해집니다. 저는 복잡한데 ㅎㅎ. 상담 시간은 2월 13일 괜찮으시다 들었어요. 오후 2시 어떠신지요? 다른 시간이 되시면 말씀 주십시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성명 : OOO (남자)

* 직급 : 차장

* 근무지(택 1) : 본점

* 상담신청 주제(택 1) : 회사와 가정 간 균형

상세 설명: 경력직원으로 입사했고 초창기에는 주니어(대리) 역할을 하며 회사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과장 시절 OOOO TF를 계기로 회사에서 중요한 포지션으로 자리도 잡고, 연차가 올라가면서 책임도 늘어나고 그에 따라 업무량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야근은 물론, 밤샘도 합니다. 그렇게 가정에 시간을 쓰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아지면서, 더 이상 회사일이라는 익스큐즈로는 와이프의 심정이 회복되지가 않습니다. 백오피스에는 사람을 충원하기는커녕 효율화하는 게 회사의 암묵적인 정책입니다. 회사, 가정, 나. 이 3개 주체가 더 이상 물러설 곳 없이 벼랑 끝에서 대치 중이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결국 내가 이 상황에서는 내 뒤편 절벽 낭떠러지로 발을 반쯤은 내놔야만 하는구나 라는 생각인데 그러다 보니 속이 썩는 것 같아서 어디에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네요. 상담받을 시간이 안 나서 신청을 못하다가 이제 잠깐 짬이 생겼습니다. 일이 폭풍처럼 몰아치듯 많을 때는 격한 마음이 들다가도 한풀 지나가는 때가 오면 잦아듭니다. 잦아들어도, 이제는 마음의 인대가 탄력을 잃어 다시 원상태로까지 회복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 일이 많아지면 또 힘들어진다는 걸 반복 학습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 상담받고자 하는 내용이 일상생활 및 업무에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체크해 주십시오. 1점-10점 (1점 전혀 영향 없음 / 5점 어느 정도 / 10점 매우 영향이 큼) 내 점수 : 7점


———


2년 전, 마음이 탄력을 잃었다. 더 이상 100% 회복이 안 됐다. 내 심정을 회사동료와는 나눌 수 없었고, 친구나 가족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상담가 친구에게 ‘나 좀 상담해 줘’라고 농담 반 진담 반 얘기했더니, 친구 간에 ‘내담자 관계’가 생기면 친구 관계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며, 대신 아는 상담가 분을 추천해 주었다. 나는 내가 이렇게 수다스러웠구나 싶을 만큼 내 속사정을 다 털어놓았다. 상담시간은 1시간이었는데 거의 1시간 20분을 떠들었다. 뒷 예약 타임이 없어서 그랬는지 선생님이 배려해 주신 것 같았다. 선생님은 그저 들어만 주셨고 별다른 솔루션을 제안하시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다른 이에게 내 상황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내가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 이외의 사람들도 겪는 감정이고, 가끔 걸리는 감기 같은 거, 심하게 앓을 때도 있고 가볍게 앓을 때도 있는 그런 마음의 감기 같은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 뒤는 벼랑 끝이 아니라 그냥 땅이었고, 잠깐 뒷걸음질 쳐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시 또 아무도 내 사정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힘들어지면,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또 찾으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에너지가 있을 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더 나아가, 시간이 지나면 내 경험을 글로 써서 불특정 다수에게 공유해도 좋겠단 생각도 들었다.


오늘 안타까운 뉴스를 봤다. 고인의 마음을 내가 다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마음이 힘들었을 당신의 평안을 빕니다.

멀리서나마 안아주고 싶은 마음으로

당신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마음으로

부디 그곳에서는 안녕히 지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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