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날수록 나의 말하기를 되돌아볼 일이 많아진다. 회사에서든 가정에서든, 카페든 식당이든 모두 다 말하기다.
업무역량이야 직장생활 10년이 지나면서부터는 더 늘 것이 없다.
나는 말하기를 왜 이리도 소홀히 했을까.
회사에 추씨 성을 가진 사업부 대표님이 있다.
실적 회의 때는 워낙 추상같아서 사업부 임직원들은 무서워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다른 사업부 직원으로서 그분과 대화를 하거나 옆에서 담화를 지켜보노라면, 그렇게 훌륭한 말하기 습관을 가진 분이 또 없다.
언젠가 그분의 언어 습관을 유심히 관찰하며 메모한 적이 있다.
조금 살을 붙여 정리해봤다.
(1) [부정어]를 쓰지 않는다
한국사람들은 다음 단어들로 대답을 시작하는 버릇이 있다.
"아니, " "근데, " "진짜, "
상대방의 말을 일단 부정하고 시작하는 셈이라 듣는 이로서는 반박당하는 느낌이다. 추 대표님은 이런 <부정어>로 말을 받으시는 법이 없었다.
예를 들면,
- 추 대표님: "이러한 사업 환경에서 우리회사가 더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 어느 팀장: "부동산 파이낸싱을 더 확장해야 한다고 봅니다."
만약 추 대표님이 아니라 성격 급한 리더였다면:
“아니 근데, 진짜! 응? 왜 다들 부동산만 떠올리는 거야? 채권 투자를 늘려야죠!"라고 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추 대표님은 상대방 의견에 반박을 하더라도, 부정어를 쓰면서 반대한 적이 없다.
- 추 대표님: “오! 부동산 파이낸싱! 그거 괜찮다. 부동산 쪽도 기회가 많겠네요. 그런데 한번 채권 투자를 늘려보면 어떨까요?”
똑같은 부정인데, 상대방으로서는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다.
(2) 0.8배속 말하기로 느껴진다.
어쩌면 속도의 차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빠르다/느리다’의 문제가 아니라 ‘성급하다/여유있다’의 문제라 생각된다.
말을 1배속보다 빨리 한다는 건 어딘가 불편함이 있다는 것이다. 본인이 우위에 있지 못하여 상대를 제압하고자 하거나, 본인을 증명해야 할 순간에 우리는 말이 빨라진다. 추 대표님은 어쩌면 갓난아기 때부터 그런 품성이었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상황을 막론하고 항상 침착하고 여유 있는 말하기를 구사했다.
그렇다고 해서, 자~. 음~. 에~. 같은 연륜 있어 보이거나 생각이 깊어 보이려 하거나, 주저하거나 하는 추임새를 넣는 법도 없었고 딱 효율적으로만 말하셨다. 말씀하시는 문장이 길지도 않은데, 말이 짧게 끝나 허공에 흩어지는 게 아니라 뇌리에 천천히 와서 쏙쏙 들어온다. 말하기 스킬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것 같다.
(3) 전문용어 안 쓰고, 일상용어를 쓴다.
어떤 분야에서 오랜 기간 일하면 대개 그 분야 전문용어에 젖어든다. 그래서 자기가 쓰는 일부 단어가 일반인들에게 어려울 수도 있다는 점을 망각한다. 그런데도 그는, 타 사업부에 있는 사람이나 신입사원,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게 쉽게 말씀하셨다. 나도 그렇게 해보려 한 적이 있는데, 내 분야의 용어를 일상적 언어로 바꾸려고 생각을 짜내느라 실시간으로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내 전문분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일상용어로 자유자재 구사하려면, 평소에 내가 하는 일의 본질에 대해 개념이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제대로 된 소통을 이루지 못하고 잘난 척 하는 사람이 되거나, 적당한 수준의 일상어를 찾지 못해 말을 더듬게 된다.
(4) 감탄사를 잘 쓰고, 상대방 기를 살려준다.
대리 시절, 한창 바쁘던 어느 날 아침, 6시 50분쯤 회사에 도착해 로비에 들어섰는데, 마침 반대쪽 출입문에서 추 대표님이 들어오고 계셨다. 멀찍이서 꾸벅 인사를 드리자 가까이 걸어오시며,
“이야~! 너 굉장히 일찍 출근하는구나. 오늘 너 운 좋다. 내가 커피 살 테니까 가자!”
그러고는 모닝커피 한잔을 사주셨다. 나란히 커피를 들고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 층까지 갔다(같은 층이었다). 그 짧은 10분 동안 많은 대화가 오고 가진 않았다. 대리급 직원과 부사장급 임원 사이에 있을 법한 스몰 토크만 오고 갈 뿐.
아침에 주로 뭘 타고 와? 요새는 어떤 일 해? 같은. 아마, 내 이름도 잘 몰랐을 거다. 그저 ‘인사팀에 있는 그 친구’ 정도였겠지. 그래도 30대 초반의 대리에게 긍정 에너지로 가득 찬 하루를 선사하기에 충분한 10분이었다.
가끔 층을 둘러보시다가 인사팀에 들르면,
"이야~! 회사에 인물 훤한 사람들은 인사팀에 다 모여있었네~" 같은 빈말도 하셨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기분 좋게 만드는 말하기의 소유자.
(5) 비전을 공유하지 않는다. 비전을 납득시킨다.
C-level 임원들이 비전을 공유할 때는 보통, ‘어떤 분야 1위’ 같은 숫자로 된 목표를 말해주고 마는 식인데, 추 대표님은 비전을 공유하기보다는 납득시키는 쪽이었다.
“우리나라 개인 금융자산이 총 1,900조 정도 돼요. 이 돈 중 1,100조가 은행에, 500조가 보험에, 300조가 증권사에 들어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하려는 일은, 저 은행에 있는 자산 1,100조 중 절반인 600조를 핀테크 분야로 넘어오게 하려는 겁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서 봤는데, 비전이나 회사 상황을 ‘공유’한다고 할 때는 그 책임과 부담을 CEO가 진다는 뜻이고, ‘납득’시킬 때는 직원이 참여하게 한다는 뜻이라 한다. (21년 5월 18일 자, Joel Schwartzberg의 아티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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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 과장 시절 추 대표님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후 내가 다른 층으로 사무실 이사를 가면서 마주칠 일이 없게 됐다. 한동안 그렇게 잊고 지내다가, 차장이 되고, 부장도 되면서 나에게 말하기에 대한 니즈가 생겨났다. 그러다 추 대표님이 생각났다. 원래 그렇게 말씀을 잘하셨던 건지 너무 궁금해졌다.
그러다가 대화를 나눌 기회가 되어 여쭤봤다. 대표님의 말하기는 타고 나신 거냐고.
웬일로 ‘부정어’를 쓰시면서 명확하게 답변 주셨다. “아니요, 타고나지 않았어요“라고.
임원이 된 후에, 어느 날 이렇게 말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그런 후 계속 신경 쓰면서 연습하고 있는 거라고. 자연스럽게 형성된 게 아니라 의지를 갖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라고. 물론 시간이 오래 흐르고서 습관화된 것도 있지만, 오늘도 말하기에 대해 생각하면서 말씀하신다고 했다.
세상에.
“말을 좀 잘해야겠구나”라고 마음먹은 상태로 있다가 연륜이 차면 자동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었군.
내가 말하기에 대해 경각심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값어치를 치렀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경각심 갖고 끝날 일이 아니라 신경 쓰고 다듬어야 한다. 역시 세상에 공짜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