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써둔 메모다. 물론 지금도 성숙지 못하지만, 메모를 읽으면서 아 내가 정말 어렸구나 싶었다.
아래 내용들은 8가지 공통점을 깨닫게 된 실제 사례들이다. 읽으시는 여러분께서는 반면교사 삼아 모쪼록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시행착오를 줄이셨으면.
1. 지나가는 얘기처럼 말하지만 그것도 지시사항이다.
1-1. 결혼생활 초반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와이프가 말했다.
"여름이니까 금방금방 버리게 종량제 봉투 제일 작은 거 사 와요."
가장 작다는 2리터짜리 묶음을 대량으로 사 오며 스스로 대견해했다. 며칠이 지났다. 와이프가 짜증을 냈다.
"쓰레기 매일마다 버리라고 했지 않아? 왜 안 버려요?"
응? 봉투를 사 오라고 했지 매일 버리라고 안 했는데? 금방금방 버린다는 말의 주어가 생략되어 있었고, 당연히 와이프 본인 얘기인 줄 알았다… 와 같은 변명은 안 통한다! 어라 이렇게 쉬운 걸 시킬 리가 없는데 싶은 말을 들었다면, 또는 지나가는 듯하는 말이지만 싸한 느낌이 든다면, 속 뜻을 되새김질해야 가정이 평화롭다.
1-2. 수년 전 일이다.
외부에서 오신 대표님이셨다. 어느 날 퇴근하시는 길에 뭔가가 떠오르신 듯 방향을 틀어 내 자리로 오셔서는 우리 회사의 성과급 지급 절차를 물으셨다. 간략히 설명드리자, “아, 그래요. … 음, 네 알았습니다.” 하고 그대로 퇴근하셨다.
그냥 궁금하셨나 보다 하고 말았다. 절차를 설명드렸으니 해소되셨겠지.
며칠이 지났다. 본부장님이 오셔서는 성과급 지급 프로세스 개편안을 만들라 하신다.
“갑자기요?”
"어, 대표님이 지시하셨어. 사업부대표의 지급 권한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써봐."
아… 그냥 절차가 궁금한 게 아니셨구나.
만약 고위 임원이 당신에게 뜬금없이 무언가를 말하거나 묻는다면, 그 이면에 숨겨진 불편함을 살펴봐 주기를. 뭔가 Pain point가 있기 때문에 그 일의 본래 절차를 먼저 확인하고자 질문했다는 점을 기억하라. 질문에는 답하되, “아 혹시, 뭔가 개선할 게 있을까요?” 하고 되물어보면 좋다.
2. 지시사항을 두 번 이상 말하게 하면 안 된다.
2-1. 와이프와 카톡을 주고받노라면,
택배를 주문해 달라든지, 주말에 해야 할 일이라든지, 지시사항들이 생긴다. 문제는 지시가 중구난방이라는 점이다. 생각을 정리해서 1,2,3 딱딱딱 할 것들을 요약해 주면 좋겠는데, 여러 번의 말풍선이 오고 가는 중간중간에 지시사항이 끼어 있다. 놓치면 안 된다.
안 놓치는 방법은,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뿐이다.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니라 업무지시를 받는다는 생각으로 정신을 차려라. 지시사항들을 추려, 그 즉시 휴대폰의 ‘알람 기능이 있는 메모장’에 기입하는 게 좋다. 아이폰의 경우 [미리 알림] 기본 어플이 좋다. 할 일과 시간을 예약해 두고 알람이 울리게 해 놔야 안 잊고 처리한다. 아 단순한 건데 기억나겠지 하다가는 놓친다 반드시.
“그때 말한 거 아직 안 했어?”와 같은 재촉하는 말을 듣는 건 딱 한 번까지다. 그다음번에는 "그거 안 했어?"와 같은 재촉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당신은 내 말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냐", "집안일에 관심이 없는 것이냐", "회사 일만 일이냐"와 같은 핀잔이 날아온다. 그러면 서로 안 좋다. 그냥 즉시 처리해 버리는 게 낫다.
2-2. 이건 동료의 얘기다.
계열사 중 한 회사가 회계기준이 변경되어 세전이익 계산 방식이 바뀌었다. 대표님 방에서 주간미팅이 끝날 무렵, 대표님이 해당 계열사에서 파견 나온 OO 차장에게 농담하듯 말했다.
"아 내가 그 회계기준을 나름 공부해 본다고 찾아봤는데, 어우~ 이건 전문가 특강이 필요한 거 같아요. OO 차장이 어떻게, 나 강의 좀 한번 해줘요."
워낙 인품이 좋으시고, 평소 농담도 종종 하셔서, 미팅 참석자들은 농담하시는구나 싶어 하하하 웃었고 그 말을 들은 OO 차장도 멋쩍게 미소를 지으며 하하 웃으며 방에서 나왔다.
방을 나오며 나는 생각했다. C-레벨 임원이 하는 말에는 빈말이 없다는 것을. 아무리 사람 좋으시고, 농담처럼 얘기했어도 이건 진짜 스터디시켜달란 뜻일 텐데… 하지만 내가 그 직원의 상급자도 아니라서 그냥 가만있었다. 알아서 준비하겠지.
다음 주 미팅시간. 회의 끝날 무렵 이번에도 대표님이 그 직원에게, “아 난 머리가 굳었나 봐요. 봐도 봐도 이 기준은 전문가의 설명이 필요한 거 같아~.” 하셨다. 이건… 지시다! 명확하다. 그런데 이 직원이 또 그냥 허허 웃고 마는 것이다. 이번에는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살짝 귀띔을 했다. 저기, 대표님이 아무리 친근한 분이라 해도, 두 번이나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정말 강의를 해달라는 지시사항인 것 같은데, 강의든 설명이든 뭔가 하셔야 할 텐데요. 그랬더니 이 직원이 ‘하하 에이 제가 어떻게 대표님한테 강의를 하나요.’ 하는 것이다. 헐? 이건 아닌데. 아, 그렇다고 내가 계열사 파견 직원에게 지시를 할 수도 없고… 일단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주, 대표님은 이 직원을 발령 냈다. 원복이었다. 본래 본인이 있던 계열사로 복귀하는 발령. 멤버 체인지. 그 회사에서 회계기준 관련 업무를 하던 직원이 새롭게 파견되어 왔다. 그리고 해당 본부장이 본사에 방문해 대표님 및 관계 부서에 회계기준에 대한 세미나를 실시했다.
오해는 마셨으면. 대표님의 성품은 지시를 못 알아들었다고 기분 나빠 교체하실 분은 아니시다. 대표님은 단지 회계기준이 바뀐 상황 속에서 해당 전문성을 가진 인력에 대한 니즈가 있으니, 업무 효과에 측면에서 대체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OO 차장이 대표님 말을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경청하여, 본인이 전문가는 아니라 해도 회계기준 전문가를 대동하여 세미나를 열었다면 교체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누가 하든, 방법이 뭐가 되었든 대표님은 니즈가 해결된다면 오케이 아니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