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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May 25. 2021

펜처럼 카메라도 강하다

무겁지만 찍을 만해

사학과 졸업했는데, 왜 카메라 잡아?


"그냥. 어쩌다 보니까" 


라고 답하기엔 카메라에 꽤 애정이 붙었다. 물어보는 사람들은 내가 신기한가 보다. 키메라 같으려나.  순수한 호기심이 때론 불편하기도 하지만, 탓하고 싶지 않다. 나도 낯선 것에 대해서는 의도치 않게 실례를 범하니까.


그러나 가끔 질문의 뉘앙스를 혼자 두세 번 곱씹어 보면 씨가 느껴질 때가 있다. '안에서 편하게 책 읽던 사람인데, 왜 굳이 현장에 나와서 기계 들고 이런 힘든 일을 하는 거야?'


은유에 가려진

계급주의적 진의가 보기 싫다


그래서일까. 단순히 카메라를 부피 큰 장비라고만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는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감이 안 온다.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곧추세우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설명하고 싶은데, '프로 불만러'로 낙인찍히기는 싫다.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사회 부적응자'가 되긴 싫다. 결국 나는 '문송해서 기술이라도 배우려고요'라는 답변으로 비겁하게 가시를 숨기는 방법을 택한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
영상이 대세인 시대니까,
그럼 영상기자가 대세 아니야?


응원 섞인 친구의 질문에 사실 할 말이 없었다. 나도 물론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면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되길 꿈꿨었다. 언젠가는 나도 내 이름을 걸고 <기로에 선 한국(Südkorea am Scheideweg)> 같은 다큐멘터리를 만들 거라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영상의 시대에서 영상기자는 지워져만 간다. 최근에 갑자기 생긴 일은 아니다.


영상기자, 촬영기자, 카메라 기자,

그리고 영상취재기자.


영상기자를 지칭하는 말은 여러 개가 있다. (가끔 자기 마음대로 감독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의 이해관계 탓에 업계 호칭 통일이 아직도 안 됐다. 카메라 기자는 속어라고 하더라도, 공식적인 단어는 부재하다. 최근에서야 지상파 방송국을 중심으로 영상기자로 통일하고 있지만, 걸음마를 뗀 정도다. 그림의 중요성은 알았지만, 말의 중요성은 등한시하던 선배들에 대한 아쉬움이 존재한다.


그래도 지상파는 낫다. 영상기자가 영상 편집을 하기 때문이다. 요새는 영상 저작권 인정 얘기도 나오는 듯하다. 반면, 종편 영상기자들의 업무 환경은 굉장히 열악하다. 대부분 자회사 소속이다. 종편에서는 영상기자가 뉴스영상을 편집할 수 있는 권한이 없기에 영상취재기자로 불린다. 저작권은커녕 편집권조차 먼 나라 이야기다. 가끔 어떻게 다들 이걸 감수하고 살 지 싶을 때도 있다. 다들 카메라에 대한 애증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듯하다. 뭐가 문제인 걸까. 애초에 출발선이 달라서였을까. 비디오에서 시작한 회사와 텍스트에서 시작한 회사. 영상에 애정을 쏟는 회사는 과연 어딜까.


좋은 동료와 일하면 이 앙시앙 레짐(Ancien Régime)에서 오는 만성 울화는 조금이나마 해소가 된다. 현장에서 함께 땀 흘리는 동료들 그나마  모순 이해하고, 해결책을 같이 찾아보려 한다. 또한 편집할  본인의 재량권 안에서 최대한 영상기자의 의견을 반영하려한다. 현장 취재를 가기 전에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만나서 서로 의견을 나누기도 한다.


물론, 소수가 앙시앙 레짐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좋은 뉴스를 만들기 위해, 역사에 오점을 남기지 않기 위해, 서로의 일을 존중하는 것. 현재로선 각자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각자 할 뿐이다.

힌츠페터가 촬영하고 편집한 영상은 1980년 광주의 참혹한 진실을 알리는 결정적 증거물이 되었다.

'By pen'처럼

'By camera'도 'For history'다.


영상기록 언어다. 글만이 기록 언어가 아니다. 미디어 민주주의 시대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수단은 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역사는 더 이상 ' 배운 자'들만의 특권도 아니며 전유물도 아니다. 따라서 글만이 살아있는 수단이라며 신성시될 이유도 없다. 영상그 자체로 살아있으며, 진실의 힘을 담을 수 있다. 그저 글을 보조하는 수단이 아니라, 영상도 영상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미디어의 위기라고들 하지만, 1020세대들은 영상에 익숙하며, 영상만으로도 의사소통을 이어간다. 글보다 영상을 주 언어로 쓰는 유튜브나 넷플릭스는 젊은 층 사이에서 흥행을 넘어서 하나의 독자적인 장르를 구축했다. 틱톡의 흥행 역시 독립적 언어로서의 영상이 존재할 수 있는가 시사점을 던져주고 다. 뉴미디어 시대에서는 영상 역시 글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독립적 존재할 수 있으며, 인간의 삶을 기록하는 탈권위적인 언어 것이다. 


518민주화운동을 카메라로 담은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결국 펜이든 카메라든 인간의 역사 앞에서는 둘 다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다른 기록 수단이다. 어떤 것이 더 효과적인 수단인지는 환경과 상황마다 다르지만, 'For history' 앞에서 'By'들끼리의 싸움은 소모적인 전쟁일 뿐이다. 


다만, 이 소모적인 논쟁을 줄이기 위해선 서로의 일 대한 존중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노동에 대한 존중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직종을 넘어서서 인간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야 뉴스의 미래, 더 나아가 인간의 역사를 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 다들 보이지 않을까. 펜은 칼보다 강하지만, 펜처럼 카메라도 강하다는 것이.


내 필름에 기록된 모든 것은
내 눈앞에서 일어났던 일.
피할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 위르겐 힌츠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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