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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Mar 14. 2021

기(술)자, 아니 그 이하

무겁지만 찍을 만해

나는 기계인가, 인간인가.
내가 하는 일은 하찮은가, 중요한가.

그 일을 하는 나는,
수단으로 존재하는가,
목적으로 존재하는가.


누군가는 나를 '(단순) 기술자'라고 부르지만, 누군가는 나를 '기자'라고 부른다. 때문에 직업적 딜레마에 빠져 정체성 혼란이 왔었다. (아니, 여전히 그러고 있다.) 전자면 '방 문' 앞까지만 나가면 되지만, 후자면 '집 대' 앞까지 나가야 한다. '방 ' '집 대문' 사이에서 이러 지도 저러 지도 못하는 나를 보고, 선배들은 종종 자조적으로 말했다.


여기가 언론사라고 생각하면 미칠 것이요, 공장이라고 생각하면 다닐 만할 거야.


인간이 기계로서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다. 더욱이 인문학도로서 인간으로 살아왔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꿈꾸던 자였기에 인생의 쓴맛을 넘어서 고통스러움을 느낀다. 선배들은 웃으면서 기계로서의 삶을 수용하는 듯하지만, 실은 알고 있다. 본심은 다르다는 것을. 선배들 역시도 누구보다도 처절하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했으리라는 것을. 자신이 찍은 영상의 메시지를 사람들이 읽어주기를 바란다는 것을.


네이버 웹툰 우리가 바라는 우리(우바우) #107 에피소드

인간이 메시지를 담아서 만드는 창작품들은 모두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글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춤이든.(현대 술에서는 메시지가 없어도 예술로 존재하는 것 같긴 하다. 아무튼,) 메시지가 거창한 것은 아니다. 경중을 떠나 창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고, 이를 실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예술품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 아닌가.


에서는 글자 하나가, 단어 하나가 꽤 중요한 의미로 쓰인다. 심지어 문장 부호 조차도 의미를 가진. 같은 사물을 표현해도 여러 단어가 존재한다. 반대로, 한 단어가 여러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만 해도 그렇다. 화자가 바라는 '님'은 연인이 될 수도, 부처가 될 수도, 광복이 될 수도 있다고 배우지 않았나.


영상도 예술이며,
영상 취재도 예술 행위다.


어떤 각도에서, 높이에서,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는 현장에서 카메라를 잡고 있는 사람의 생각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밑에서 잡는 로우앵글과 위에서 잡는 하이앵글은 각각의 의미가 있다. 전체를 담는 풀샷과 가까이서 잡는 클로즈업샷도 각각의 의미가 있다. 또한, 카메라에 담긴 배경과 사물에도 창작자의 의도가 담겨 있다.


그렇기에 창작자에게 '이것 찍고 저것 찍어주세요'라는 무심한 주문 창작자를 좌절시킨다. 창작자의 주관을 무시하는 행위기 때문이다. 예술과 사람에 대한 존중이 없기에 그리 쉽게 내뱉을 수 있는 것이다. 내뱉는 이의 눈에는 카메라 뒤의 사람이 '기(술)자', 아니 그 이하인 또 다른 기계로 보일 뿐이다.


너 왜 반대편 그림은 없어?
한쪽만 있잖아.


입사 초 내가 찍어 온 집회 영상을 보고, 부서 선배가 꾸짖듯이 말했었다. 집회 참가자와 경찰이 대치하는 그림이었다. 나름 취재용 사다리 타고 올라가서 열심히 잘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은연중에 나는 참가자와 경찰 중 한쪽 시선에서만 그림을 찍고 있었던 것이다.  중에 한쪽 입장에서만 상황을 바라본 것이었다. 영상 속에서 집회에 대한 생각은 매우 정직하게 드러났다. 선배의 지적에 할 말이 없었다.


누군가가 반문했다. 꼭 기자 인정해줘야만 '대문 앞'까지 나와 일할 수 있는 거냐고. 너희는 그래야만 일하는 거냐고.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하지만)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이름을 갖고 싶어 하지 않나. 이름이 없는 사람은 없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들은 자기 이름은 잘 챙긴다. 자신의 이름은 귀한 줄 알면서, 남의 이름은 그렇게 철저히 무시를 해도 되는 건가.


물론, 이름이 없어도 숨이 붙어 있으니 '방 문'과 '집 대문' 사이, '거실'쯤에서 살아가긴 할 것이다.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고 있을 거다. 예술과 (단순) 기술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면서, 고뇌로 혼돈의 시간을 채우고, 끝내는 좀비가 되어서 말이다.


언젠가는 사람들이 기억해주고 알아주길 바란다. 뉴스 영상도 예술이라는 것을. 비록 영상기자의 손은 굳은살이 박여 거칠고 투박하더라도, 그들이 담은 그림의 의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군가가 땀 흘리고 현장에 애써서 표현한 예술품이고 창작물이라는 것을. 카메라를 잡고 있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이상'만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 일본 드라마 <중쇄를 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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