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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Dec 18. 2021

스쳐가는 말들 속에서

뜻 밖의 발견

... 애인 있어요?


하우스메이트를 구하는 첫자리. 그 자리에서 A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 당황했다. '애인'. 소설책이나 자우림 노래 가사에나 나올 법한 오래 묵은 단어. 우리의 일상에서는 '여친' 혹은 '남친'이라는 단어가 더 쓰이지 않나. 잘 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물어봤다.


- 애인이요?

- 네, 만나는 분이요.


작은 마당이 있던 그 집에서 나는 A와, A의 친구들과 하우스메이트로 1년 남짓을 같이 살았다. 예술하는 사람들과의 동거는 낯설면서도 편안했다. 그렇게 그 셰어하우스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냈다. 일상에 익숙해지고 나서야 애인이라는 단어를  연유를 물어봤다. A의 답은 간단했다.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여자일 수도 남자일 수도 있지 않냐는 것.


듣고 보니 그렇다. 여자가 여자를 만날 수 있고, 남자도 남자를 만날 수 있는데. 어쩌면 내 무의식 속에는 당연히 여자는 남자를 만나고, 남자는 여자를 만난다는 공식이 있지 않았나 싶다. 나의 PC함이 그 '애인'이라는 단어 하나 앞에서 무색하게 느껴졌다. 평상시 뇌가 벌거벗겨진 기분.


, 떨어뜨리셨는데요 


사람들은 말을 종종 흘리곤 한다. 나는 의도치 않게 그 떨어뜨린 말을 주울 때가 있다. 주워서 주인에게 돌려줄 때도 있지만, 못 본 척 지나갈 때도 있다. 때론 몰래 그 말을 주워서 어떻게 생겼나 돌아가는 길에 찬찬히 살펴보기도 한다. 나 역시도 뭐, 말을 떨어뜨렸을 때가 있었을 거다. 누군가가 봤겠지.


몇 번 주워보고 깨달은 게 있다.  명이 떨어뜨리면 개인의 에피소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말을 여러 번 떨어뜨리면, 거리에는 같은 말들이 넘쳐나게 된다. 떨어진 말들은 씨앗이 될 수도 있지만, 쓰레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집단의 문화가 된다. 그리고  문화는 사회가 .


예를 들어,

- 외교관계:  외교적으로 우호적인 나라를 가까이에 쓴다. 본국을 지칭할 때는 본국을 앞서 쓴다. 예를 들어, 북 - 미 - 중 - 일 순서대로 쓰인다. 역으로 미북관계, 중미관계, 일중전쟁으로는 흔히 안 쓴다. 남한과 북한 관계를 묘사할 때는 남북관계라 쓴다. 반면, 북한에서 쓸 땐 북남관계라 표현한다.

- 남녀노소:  남-녀, 노-소 순서대로 쓰인다. 남자와 여자가 있을 땐, 남자를 앞에 쓴다. 여남 관계, 모부님이라고는 흔히 안 쓴다.

- 사제지간, 선후배:  나이가 많은 사람과 나이가 어린 사람을 같이 쓸 때는 연장자나 권력 우위에 있는 사람을 먼저 쓴다.


신기하다. 입술과 입술 사이에서 그 좁은 공간에서, 찰나의 순간에서, 내뱉은 소리 속에서 사람과 집단의 생각이 보인다는 것이. 더 나아가 발화자의 인생이 보일 때도 있다.  하나만으로도 어떤 생각으로 본인의 인생을 살아왔는지, 어떤 관점으로 사람과 사회를 보는지가 드러난다.


때로는 말속의 의도와 권력이 읽혀 피곤할 때도 있다.  사람이 혼자 사용하는 거면 차라리 낫다. 그러나 사회 전반에서 대놓고 쓰인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개인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반에서  '말'이 상용되었다면, 이는 일부가 아닌 사회 문화가 된다.  문화에 나 자신이 어울리지 못할 때 피로감은 배로 느껴진다.


"엄마 아빠"가 불편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이 단어불편했다. 어버이날에 쓰곤 했던 부모님께 보내는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는 단골 문장. 이 여자 어린이는 왜 "아빠 엄마 사랑해요"라는 단어는 많이들 안 쓸까 궁금했다. 다른 건 '아빠'가 앞에 오는데, '엄마 아빠'만 여자가 앞에 오는 게 의아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직도 사회에선 주된 양육자를 엄마로 보고, 그 때문에 아이들이 아빠보단 엄마를 찾으니까 그랬던 것 같기도 한데.) 그때 당시 나는 괜히 반골기질이 발동해서 "아빠 엄마 사랑해요"라고 꾸역꾸역 고쳐서 쓰기도 했다.


말에 생각이 지배되지 않도록


가랑비에 옷 젖듯이, 말도 생각을 지배한다. 생각에서 말이 나올 때도 있지만, 말도 하다 보면 생각을 지배하게 된다. 스스로가 타인을 비하하고 차별할 의도가 없었음에도, 말을 하다 보면 그렇게 되는 것 같다. 함부로 말해도 되는 사람은 결국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것이 중요한 건가 싶기도 하다.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다는 것은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해 준다는 거니까. 존재가 지워지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영상기자'라는 이름이 있는데도, 누군가 나를 '촬영팀', '촬영기사', '카메라팀'으로 부를 때 기분이 언짢은 것처럼.


같이 했던 할로윈 파티

A는 굉장히 맑은 친구였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친구였다. 자신을 매우 사랑했고, 사람을 사랑했다. 술에 취하면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던 친구였다. 본 투 비 예술가였다.


그래서였을까. A가 내뱉은 '애인'이라는 단어에서는 그 어떤 차별도, 편견도, 의도도 읽히지 않았다. 순수함이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여친이나  남친이라는 특정 단어에, 특정 역할에 가두지 않고, 애인이라 말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는 A가 부러웠다. 


A의 스쳐가는 말들 속에서 품격의 향이 느껴졌다.


나는 타인에게 별 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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