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 진희 씨에게 해외여행이란?_2편
탤런트 김수미 선생님이 돌아가신 즈음이었다.
예정해둔 해외여행 날짜까지는 한 달이 조금 안 남은 때였다.
솔직히 엄마와 나는 그때까지 아빠의 당뇨 수치에 대해 무지했다. 김수미 선생님이 당뇨로 인한 혈당쇼크로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우리 모녀는 아빠의 상태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우리 모녀에게 아빠의 혈당수치 400은 별 것 아닌 수치였다. 그 이상이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단골 병원의 원장님뿐이었다. 김수미 선생님이 아빠와 비슷한 수치로 유명을 달리하지 않았다면. 엄마와 나는. 우리를 나무라는 단골 병원의 원장님을 되려 위로하거나 진정시키려 했을지 모른다. '아, 김○진 걔는...' 또는 ' ○진 원장은 젊은 사람이 유난스럽게...' 어쩌면 퍽 귀찮아했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 집 가훈이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갑상선 암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날 아침에도 신나게 강화도로 해물칼국수를 먹으러 갔고, 자궁에 다발성 근종을 제거하는 수술날에도 작은 캐리어하나만 끌고 병원으로 가는 시내버스에 올랐다. 자궁근종 수술은 생각보다 길어져서 대략 6시간쯤 걸렸던 것 같은데, 수술날 저녁에만 엄마가 병실에 와서 자고 갔던 것이 병간호에 전부였다. 가족 중에 그런 나를 평소와 달리 별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통증이 커서 신경질이 났던 것 빼고는 나도 그런 가족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젊은 시절. 생사를 오고 갈 만큼 병치레가 심했던 아빠에게서 물려받은 성품이었다.
그런데, 김수미 선생님이 당뇨로 돌아가신 것은. 특히, 엄마에게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내 짐작대로라면, 대중적으로 친근함의 대명사인 김수미 선생님을 다시는 브라운관에서 볼 수 없다는 상실감이 제일 큰 것이었고, 그녀처럼 유명한 사람도 죽는데, 하물며 -엄마 보기에는 시원치 않은-우리 영감은 말할 것도 없을 것 같다, 는 것이 엄마 생각이었을 것이다. 결국,
엄마는 아빠를 해외여행에 데려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두 분 모두 함께 여행에 가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엄마는 예정대로 이모 부부와 비행기에 오르고, 아빠만 카페에 남긴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빠는 머쓱한 표정 한 번 짓지 않았다. 죽어서라도 '할아버지카페'에 출근하는 것이 즐거움인 아빠니, 나도 크게 의견을 내지 않았다. 되려 엄마의 잔소리 없이 고요한 할아버지카페를 즐기는 것이 아빠에게 큰 즐거움이려니 싶었다.
그리고 우리 아빠, 진희 씨는.
걷기 시작했다. 아빠는 척추협착증으로 지팡이 신세를 지기 시작한 후로는 걷는 것을 그토록 성가셔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우리가 사는 연립 입구에서 언덕을 오르는 것이 힘들다는 핑계로 50M도 안 되는 거리에 차를 끌고 내려오라고 떼를 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쌍문동 우리 집에서 우이동 가게까지는 1Km가 조금 안 되는 거리였다. 그런 아빠가 아침저녁으로 등에 땀이 흥건해질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어둑한 골목길에서 앓는 소리를 내며 걷는 아빠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자꾸-실베스타 스탤론이 필라델피아 예술사 박물관 계단을 오르는-영화 로키의 한 장면이 떠 올랐다. 쓰고 보니, 이건 과장이 심하다.
그리고, 아무튼. 평소에는 입이 깔깔하다는 이유로 사놓고도 드시지 않았던 파로 잡곡밥을 아빠는 참, 잘도 드셨다. 그 좋아하던 찐 고구마 간식도 끊고, 길 건너 구름빵 카페의 소금빵과 밤식빵도 손에 대지 않았다. 명색이 바리스타가 커피도 입에 대지 않으셨다. 그리고 결국. 비행기에 오르기 전, 아빠의 혈당은 150을 찍었다.
별 탈 없이 여행을 다녀온 아빠는 현재 베트남에서 사 온 망고젤리를 오물오물 드시면서,
함께 다녀오지 않은 동네 큰아빠들을 불러놓고 여행자랑 중이다.
내년에는 형님이랑 대만 한번 가유,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