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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Aug 04. 2021


한여름 밤, 바람이 알려준 것들

뜨거웠다가 식어야 시원하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택배를 시킬 일이 자주 있다. 택배가 도착하면 어김없이 상자를 둘러싼 테이프를 뜯어낸다. 뜯어낸 테이프 안쪽면에 묻은 상자의 표면 조각을 멍하니 바라본다. 악착같이 달라붙은 테이프에 자신의 살점을 내어준 것이다. 테이프는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자 온 힘을 다해 달라붙었을 테고 그 결과 상자 겉면을 물고 늘어져 같이 쓰러졌다. 이렇게 달라붙는 행위는 요즘 논리로 보면 쿨하지 못한 태도인데 말이다.


그. 런. 데.  나   더. 위. 를 먹. 은. 걸까?

왜 저 끈끈하게 달라붙는 행위가 삶의 애착으로 보일까?


풀로 붙여놓은 편지 봉투는 또 어떤가? 꽉 다문 입구를 떼내면  봉투 윗면이 한 꺼풀 벗겨져 있다. 봉투 윗면은 미처 자신을 챙길 틈도 없이 아랫면을 꽉 붙들고 있다가 떨어지느라 자신을 내어준 것이다. 대신 아랫면엔 종이 조각이 도톰하게 겹쳐 있다.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가 떨어지며 생긴 흔적. 그 흔적은 그들이 함께 한 시간을 나타낸다.  택배 상자의 겉면 살점을 떼어낸 스카치테이프의 집착이나 편지봉투의 윗면을 아랫면에 더해준 흔적이나 삶의 열정으로 느껴진다 (확실히 더위를 먹었나 보다).




우리 집 식탁 위에는 늘 포스트잇이 구비돼 있다. 급하게 나갈 일 있을 때, 식탁에 차려놓은 음식에 대한 설명을 쓰기도 하고, 식사 뒤 꼭 식기세척기에 넣어야 한다는 말을  구두가 아닌 서면(?)으로 남기기 위한 것이다.

("못 들었어"라는 말은 허용되지 않는다).


여러 번 사용하고 난 뒤, 포스트잇의 마지막 뒷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뒷면의 접착력은 사라지고 이물질조차 붙어 있지 않은 모습.  이제는 더 이상 어디에 붙을 수도 없는데 붙었던 흔적조차 없는 말끔한 모습이다. 

시크하리라고 기대했던 것과 달리 처량하다. 온전히 자신 그대로 보존했기에 오히려 더 쓸쓸해 보인다. 

그 매끈한 뒷면이 ' 역사가 없는 나라'처럼 다가온다.



                                                     <픽사 베이  Jeon Sang-O 님 사진>



언제부터였을까? 사람 관계에 대해 기대를 별로 하지 않는다. 오랜 기간 동안 갈등을 겪고 실망을 한 뒤 내린 결론이다. 포스트잇처럼 어딘가에 붙을 때, 떨어질 때를 대비하며 나를 내어주지 않는 관계를 지향해 왔다. 

내 흔적을 남기지도 않고 상대방 흔적을 담아오지도 않는 그런 쿨한 관계.  

이십여 년 전에 읽어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김영하 작가의  <포스트잇. 2002 >을 읽은 것도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 김영하 작가는 <포스트잇>에서 "아무 흔적 없이 떨어졌다. 별 저항 없이 다시 붙는 포스트잇 같은 관계들"이라고 표현했다.  내 기억으로는 포스트잇에 관계를 비유한 최초 작가는 김영하 작가다.


'기대를 내려놓으세요. 상대방에게 대가를 바라면 안 돼요. " 

'가까운 사이에도 일정 거리는 두어야 해요.'

그 이후로도 관계를 다루는 책에 늘 나오는 이야기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한 거리두기는 나와 상대방 모두를 지키며 관계를 지속하게 해 준다 (나도 내 책에 이런 내용을 썼다).


이런 수련?을 한 덕분에 예전보다 마음의 상처를 받는 일은 줄어들었다. 

안전거리를 지키며 서행하는 데 사고가 줄어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 런. 데.  참 묘하다. 사고도 줄고 속상할 일도 없는데 왠지 모르게 허전하다. 삶이 무료하고 권태롭다. 다 쓰고 난 포스트잇 뒷면처럼.


사실 이런 마음 가짐은 최선책이 아닌 차선책이다. 마음의 진심을 한 스푼씩 덜어내는 것.

말하자면 '사랑하면서 열정을 다해 살기' 위한 이상적인 방식이 아니라 '상처를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면서 일상을 타격 없이 유지하기' 위한  자기 보호 방식이다.

인생에서 '열정'을 내려놓고 '안정'을 선택하는 것. 내 마음에 피어나는 열정을 자유의지로 펴기도 전에

안정을 위해 타협 의지를 따르는 것이다.


왠지 나 자신이 에너지 소비 효율 1등급 딱지를 붙인 냉장고가 된 기분이다.


'한평생' 절전형 냉장고로 사는 삶이 가치가 있을까?

음.... 물론 경제적이다. 나이 들면서 어느 순간 저 상태로 태세 전환하는 건 불가피할 수도 있다. 

다만 평생 절전형 냉장고로 살아왔다면 후회가 더 짙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글을 쓰느라 지난날을 뒤적여 보니 알겠다. 

효율 1등급일 때보다 효율 미달일 때, 삶의 의미 가득한 적도 꽤 있었다는 것을.


떼어낸 테이프에 붙어있는 상자 겉면 조각이 글의 소재가 된다는 것을.

비칠 정도로 얇아진 봉투의 윗면이 삶의 굵은 글씨로 새겨진다는 것을.

'너무 일찍' 포스트잇으로 태세 전환을 한 나는 이 나이에도 삶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포스트잇 최후 모습처럼 다른 종이 조각하나 붙지 않은 채, 오롯이 내 상태를 보존하는 일상으로는 삶을 

짙게 담을 수 없다.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나만 남아있고 삶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의 어느 한 시기'는 딱풀처럼, 스카치테이프처럼 내 마음의 열정을 다해보는 것,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나를 관통하는  상처가 진정성 가득한 사랑에서 비롯됐다면 

그 상처는 내게 흉터가 아닌 무늬로 남을 것이다. 

지난날 내가 남기고 온 흔적, 내가 뜯어온 살점이 내 삶의 무늬가 되었다.

비로소 내 안에 삶이 그려진 것이다. 내 무늬, 내 역사. 내 삶이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나만의 무늬를 만들어 가는 건지도 모른다.



한 여름 낮을 달구던 더위. 그 더위를 관통했던 바람이 밤이 되자 서늘하게 식어 맨살을 스쳐 지나간다.

더위가 한풀 꺾인 밤에 이르러서야 쿨한 바람으로 일깨워준다. 

한낮의 열정이 있었기에 밤바람이 상쾌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한 여름밤을 더없이 사랑하는 이유다.

                                                                                                                 

                                                           

                                                                  <대문사진 픽사 베이  Markus Distelrath님>

      


이 글을 쓰고 나서 생각해 보니, 전에 학창 시절 학업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소재로 글을 썼던 생각이 났어요.

대상만 다르고 심리는 비슷한 듯해서 같이 올려봅니다.



https://brunch.co.kr/@nichts2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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