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한 눈가의 그림자를 지우려는 듯 손등으로 눈 주변을 문지르며 말끝을 흐린다. 그리고는 자신의 노력이 배신당한 슬픔에 아이는 침대로 파고든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내 언어 목록 안에서 어떤 말을 꺼내도 아이의 기분을 나아지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마음을 담을 수 있는 말 그릇이 너무 얕다.
아이의 공부 완성도를 측정하려고 시험을 보는 것일 텐데 아이가 시험을 보는 건지 시험이 아이를 보는 건지 혼동되곤 한다. 성적표에 매겨진 숫자로 위축되기도 하고 벅차오르기도 하는 매여있는 상황. 그런 상황에 처한 아이가 측은하다고 내 아이만 떼어 데리고 나올 수도 없다. 큰 아이에 비해 목표와 느슨하게 묶인 아이인데도 이번엔 실망감이 큰가 보다. 누워있는 아이 어깨에 손을 얹어 툭툭 두드려 주고 방문을 닫고 나왔다. 아이가 오롯이 느끼고 감당해야 할 감정이다.
사실 당장의 성적보다 더 걱정스러운 점이 있다. 자신이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하면 한동안은 공부 의욕을 잃을 거라는 점.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낼 날이 내 눈앞에 그려진다. 앞으로 몇 주를 지켜봐야 다시 돌아올까? 마음이 갑갑하다가 문득 나를 닮아 그렇다는 생각에 이른다. 아빠를 닮은 큰 아이는 기대가 무너져도 곧잘 일어나 달리곤 했으니까. 되돌아보면 내게 그런 시기는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지나온 세월 속, 색이 선명하지 않고 흐려져 있는 기간. 그 기간의 나는 삶의 한 복판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있었다.
냉장고 앞으로 간다. 맥주 한 캔을 따 잔에 따른다. 하얀 거품과 같이 쏟아지는 맥주를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긴다. 맥주의 실체는 거품의 표면일까? 거품이 사라지고 난 뒤 맥주의 표면일까? 맥주를 멀거니 쳐다본다. 아이는 지금 자신의 노력에 대한 성과, 성적에 대한 기대감이 거품처럼 사그라지는 슬픔에 빠져있다. 거품이 사라질 때는 아프다. 한 방울 한 방울 터지며 아려온다.
아이의 모습에 수십 년 전 내 모습들이 겹쳐진다. 저 거품 속에 스며들어있다.
내 안의 잠재력과 노력에 대한 은밀한 기대, 나만의 상대에 대한 미련한 착각....
나한테 기대했다가 좌절하는 게 싫어서, 지쳐서
상대에게 바랐다가 실망하는 게 구차해서, 초라해서
내 안의 바람과 기대를 지우고 사는 연습을 하곤 했다. 기대가 차 오르는 순간, 곧 터질 풍선을 힘껏 불고 있는 것 같은 내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래서 멈칫하다 얼른 풍선을 내 버렸다.
기대만큼 결과를 이루는 데는 내 노력 이외에도 여러 변수와 운이 작용했고 기대에 못 미친 결과를 마주하는 일은 씁쓸하며 헛헛했다. 그 쓴 맛을 지우기까지는 여러 번의 헹굼이 필요했고 헛헛함을 채우기까지 수만 차례 숨을 들이마셔야 했다. 그 과정이 소모적이라 싫었다. 차라리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심드렁한 표정과 희미한 초점으로 부풀어 오르는 거품을 잠재우곤 했다. 그 훈련 덕분인지 웬만해선 기대감도, 목표도 발생하지 않는 무거품 맥주처럼 살던 때가 있었다. 두려움에 잠식됐던, 맛도 멋도 없었던 시절. 이제와 되감기 해보면 빈 화면만 나오는 그때가 제일 후회스럽다.
지금의 아이 나이와 비슷할 때였던 것 같다. 성적이 기대만큼 잘 나오면 시험이 끝나자마자 바로 공부에 매진했던 반면, 기대했던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공부하기가 싫었다. 내 노력이 배신당했단 생각에 외면하곤 했다.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거나 연습장 한 권 가득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채워 나갔다. 지금 되돌아보면 참 한심한 태도지만 그 당시엔 내 안의 억울함을 푸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난 지금 아이의 심정을 안다. 다시 한번 돌진하기에 두려운 거다.힘껏 달려갈수록 더 세게 실망에 부딪칠 까 봐 일부러 속도를 줄이는 걸 수도 있다. 그런 태도가 내게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머리로는 알지만, 내 몸속 세포들은 거부했다.
내가 도서실에 가서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도 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 저지감 때문인지 그림을 그리며 놀면서도 유쾌하지 않았다.
이제와 되돌아보건대 그 당시 내겐 주차 브레이크( 전에 사이드 브레이크라 부르던 것이 요즘엔 차 하단에 있는 경우도 있고 운전석 옆에 있는 경우도 있어서)가 채워있었던 것 같다. 주차 브레이크를 채운채 앞으로 나아가는 자동차처럼 놀면서도 마음 한편이 묵직했다. 내게 있어서 주차 브레이크는 "두려움"이었다. 또다시 내 노력이 제대로 된 결과를 못 만들 것에 대한 두려움.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다시 도서실에 갔다. 어둑한 도서실 전체 조명과 도서실 책상의 밝은 조명이 대조를 이루며 '네게 세상은 책상 안 이곳뿐이야'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반작용이 거세던 즈음이라 어김없이 수학 연습장에 온갖 그림들을 그려 나갔다. 거의 반권을 다 채우고 시계를 보니 집에 갈 시간이었다.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가 도서실 문을 여는 순간, 아빠가 도서실 앞에서 기다리고 계시다가 나를 보고 웃으셨다.
"너무 늦어서 데리러 왔지"
늦은 밤. 딸의 귀가를 걱정한 아빠는 걱정이 돼서 데리러 왔다고 했다. 그 순간뭔가 둔탁한 것으로 가슴을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을 애써 느끼지 않으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힘들지?"
"네? 네.."
보통 종알거리던 나는 그날은 조용히 거리 풍경만을 눈에 담은 것 같다. 가로수 등 빛과 듬성듬성 켜 있는 빌딩 창문에서 새 나오는 불빛, 양쪽 빛으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살아나곤 했다. 차가운 밤공기로 잔뜩 구름 끼었던 머리가 명징하게 개는 느낌이었다.
그 후, 다시 성실하게 공부하던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날 밤 아빠의 "힘들지?' 그 한마디 때문이었는지, 그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때가 돼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그 순간 아빠의 미소와 말씀이 또렷이 기억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제자리로 돌아와 새로운 마음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목적지만 머릿속 가득했던 때와 달리, 점점 내가 나아가는 속도감을 즐길 수 있게 됐다. 그 순간만큼은 목적지에 도착하는지 못 하는지를 잠시 내려놓은 채, 앞으로 나아갈수록 내 시야에 들어오는 모습이 바뀌는 것에 몰입할 수 있었다. 한발 한발 나아가는 것에 집중하면서 두려움도 전보다는 차츰 줄어들었다.
그 후로도 이따금씩 두려움에 사로 잡혀 출발하고도 주차 브레이크를 풀지 못할 때가 있다. 나아가려는 건지 제자리에 있으려는 건지 주저하며 두 힘이 충돌하는 순간들... 그때마다 자세를 바로 잡고 이대로 정지할 건지 나아갈 건지 내 마음부터 읽으려고 한다. 그리고 나아가기로 결정한 순간, 주차 브레이크를 풀고 속도감에 집중하려고 한다. 마침내 내가 도착한 곳이 처음 의도한 목적지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곳을 목적지가 아닌 곳이라고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새로운 도착지로 받아들일까 한다.그리고 나아가는 나 자신을 뒤로 잡아당기는 힘은 없는지 수시로 점검하려고 한다.
지난 학기 성적에 실망한 작은 아이도 당장은 자신의 노력이 배신당한 억울함에 빠져있다. 그래서인지 노력이 허투루 날아갈까 봐 노력을 아끼는 모습이다. 컴퓨터 앞에서 인터넷 강의 대신 여러 사이트 창을 띄워놓고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런 시간들을 지나고 나면 그 시간들이 주는 저지감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저지 감은 두려움 때문이었다는 걸 깨닫고 서서히 자신의 판단으로 두려움을 벗어버렸으면 한다. 앞으로 나아가며 그 승차감과 차창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바람에서 일상의 기쁨을 느낄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