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상황 같은 감정 ( 다른 X 같은 Y 시리즈 3 )
몇 년 전, 잡지사에서 기사를 쓸 때 일이다. 사춘기 아이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내편이 되어줄래> 노미애 저자와 인터뷰를 했다. 그 당시 작은 아이가 사춘기 초입이었기 때문에 인터뷰 중 나도 모르게 사춘기 아이를 둔 엄마의 입장에 몰입하곤 했다. 급기야 인터뷰가 아니라 개인 상담을 하는 것처럼 사춘기에 대해 파고들었다. 저자는 그런 내 모습이 보기 안타까웠나 보다.
인터뷰 중 나의 쏟아지는 질문에 저자는 잠시 제동을 걸었다.
" 잠시 눈을 감아 보세요."
" 네?"
" 잠시만요."
좀 황당했지만 그냥 감으라니 감았다.
" 자 지금부터 다른 건 다 생각해도 좋은데요. 하얀 양털 구름만 생각하시면 안 돼요. 꼭 양털 구름은 떠올리지 마세요. 자. 양털 구름 생각 안 하시죠?"
지시대로 눈을 감고 양털구름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양털 구름만 가득 들어차 있었다.
" 어떠셨어요?"
"......"
" 양털 구름만 떠다녔죠?"
" 네."
" 아이들도 마찬가지예요. 우리의 무의식은 부정어를 인식하지 못해요. '게임하지 마'에서 '게임'이란 말만 인식하고 '하지 마'는 인식 못해요. '게임하지 마'는 결국 아이들에게 게임에 대한 상상만 떠올리게 할 뿐이에요."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그동안 내가 아이한테 했던 대화가 둥둥 떠올랐다. 각종 부정어로 가득 차 있어서 모두 수거해서 쓰레기 봉지에 담으니 봉지를 가득 채우고도 넘칠 지경이었다.
아침 등교 준비하는 아이 뒤통수에 대고
"체육복 빨아야 하니 학교에 두고 오지 마." (가져와 하면 될 걸. 굳이 더 길게 말하는 번거로움까지;;;)
"오늘 단축수업이지? PC방 가지 마." ( 일찍 와하면 될 걸. 내 말로 생각하지 않았던 pc방이 떠올랐을 것;;;)
이렇게 말하곤 했다. 물론 아이는 말을 듣자마자 대답만 건성으로 "네"할 뿐이었다.
내가 태어나 한 첫말은 "엄마"가 아니라 " 아니야" 일수도 있지 않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에게 금지어로 치밀하게 지시를 내릴 때보다 "그래. 네 일이니까 네가 잘 알아서 해"라고 할 때, 아이와의 갈등도 줄고 규칙도 잘 지켰던 것 같다. 단기적으로는 엄마가 불안하지만 엄마가 불안함을 티 내지 않고 극복하는 사이, 어느새 아이는 규칙 안으로 찾아 돌아오곤 했다. (물론 아이가 좀 강할 경우엔 아닐 수도 있다;;)
전에 아이 교육 설명회에서 모자사고 선생님께 아이들이 왜 게임에 열광하는지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어머님, 어머님들이 보시기엔 아이들이 아무 생각 없는 것 같죠? 아니에요. 아이들도 다 공부를 잘하고 싶어 해요. 사실 어머님들 보다 더 간절한 건 아이들 인지도 몰라요. 그런데 생각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으니 속으로 상처를 많이 받는 거예요. 그때, 게임을 하게 되면 게임은 열심히 한만큼 쉽게 성과를 주기 때문에 학업에서 얻지 못한 성취감을 게임에서 얻는 거예요 "라고 설명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아이들은 '하면 된다'는 말을 공부가 아닌 게임을 통해 몸소 느끼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각종 시험과 대회에서 좌절한 아이들에게 필요한 말은 유혹을 심어주는 '금지어'가 아닌 '격려'일지도 모른다.
되돌아보니 나도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주간 회의에서 팀장의 말을 들으면 그 말이 흡수되지 않고 튕겨나가곤 했다.
"현 입시제도 비판을 쓰지 마세요. "
"........................." (비판을 하려면 현 입시제도를 하지 다 지난 입시제도를 비판할까;;)
"한 기사에 너무 많은 주제를 담지 마세요. 이야기가 산만해요."
"........................" (내 속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같은 말이면,
"현 입시제도 비판보다는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루는 게 좋겠어요."
"한 기사에는 한 주제만 담는 게 좋아요"라고 말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부정어가 전하고자 하는 '금지의 대상'은 우리의 무의식 안에서 그 '금지'의 빗장이 풀린다.
그리고 '말'에서 걸어 나와 '생각'으로 자유롭게 떠돌아다닌다.
그 이후로 말을 할 때 상대방에게 내 말이 흡수되게 하는 능력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실제로 팀장의 지적은 내게 흡수되지 않았고 내 기사 작성 실력은 전혀 늘지 않았다. 아직도 글을 산만하게 국수 뽑듯이 주르륵 길게 늘여 쓴다 ;;
되돌아보면, 금지어가 무력화되는 현상은 타인에게 지시를 받을 경우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었다. 나 자신에 대한 다짐에서도 금지어에 둘러싸인 '금지 대상'은 오히려 '집착 대상'이 되곤 했다.
대학 1학년 때 164cm에 48kg을 목표로 다이어트를 해보겠다고 '빵은 먹으면 살찌니까 절대로 안 먹을 거야'라고 결심했던 기억이 난다. 안타깝게도 그런 굳은 결심에서 '안 먹을 거야'라는 부정어는 사라지고 머릿속엔 '빵'이란 단어만 떠돌아다니곤 했다..
'빵은 안 먹을 거야.' '빵은 아~ 먹을 거야' '빵은' '빵' '빠빠 빵'
눈이 온다.
첫눈이다.
보고 싶은 사람, 그럼에도 다시는 볼 수 없는, 멀리 떠나간 분이 떠오르는 날이다.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면 더 떠오르기 마련이겠지' 하면서 잠시 무장 해체하려고 한다.
평소에 마음속 서랍에 고이 접어 넣었던 그리움을 꺼내
한 장 한 장 넘기며 펼쳐 볼 생각이다.
첫눈이니까.
<사진 출처: 픽사 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