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들 둘 엄마다. 누군가 아들들에게 "네 엄마 어떤 분이시니?"라고 묻는다면 두 아들은 '나'라는 같은 사람을 두고 각자 다른 묘사를 할 것이다. 큰아이는 엄격하고 칭찬에 인색한 엄마로, 작은 아이는 다소 느슨하고 자신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엄마라고 표현할 것 같다.
큰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난 이십 대였다. 정확히는 스물일곱. 아직 '나'를 제대로 세우지도 못했던 시절. 서 있지도 못하는 데 아이를 안은 모양새였다. 아이가 나인지 내가 아이인지 분간을 못하고 헤매면서 참 많은 시행착오를 했다. 나에게 육아란 퍼즐판을 놓고 완성형 그림을 향해 하나하나 맞춰가는 과정 같았다. 채워진 퍼즐보다 채워야 할 빈자리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거의 다 맞춰진 퍼즐 그림을 보며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부족한 한 두 조각을 찾아 늘 눈빛은 분주했고 표정은 굳어있었다. 해야 할 숙제가 남은 저녁처럼 마음이 무겁고 뒷목은 묵직했다. 내 상태가 그러니 아이한테 하는 말도 지적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 엄마로서의 미숙함은 밖으로도 새어 나왔다. 큰 아이 담임선생님 면담할 때면,
" 어머님 아이가 수업시간에 집중도도 높고 무엇보다 탐구력과 과제집착력이 대단해요."
" (괜히 쑥스러워하며) 선생님 아니에요. 그런데 선생님(뜬금없이) 아이가 좀 사교성이 부족하죠?"라고 하면서 아이의 장점은 흘려듣고 단점을 먼저 자진 납세하듯이 줄줄 읊어댔다. 그 당시에는 겸손 모드 장착은 필수라고 여기며 내 아이를 자랑하는 것은 물론, 자랑을 듣고 호응하는 것도 어색했다. 게다가 실제로도 내 머릿속에는 아이의 작은 단점 하나를 극복시키겠다는 투지로 가득 차 있어서 누가 툭 치기라도 하면 나도 모르게 아이의 단점이 흘러나왔다. 엄마의 역할은 아이의 단점을 완화시키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나고 보니 어리석었다.
이런 내 아이 디스 하기는 학부모 모임에서도 이어졌다.
" J엄마, J가 이번에 수학 경시대회 상 받았다면서요? 어우. 어쩌면 그렇게 아이가 똑똑해요?"
"에고... 그거 다 제가 일하느라 만날 학원에 보내서 그런 거예요. "
"????"
실제로 아이 방학 때면 내 일이 더 바빠졌기 때문에 집에 혼자 둘 수 없어서 가까운 학원에 자주 보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싫다는 소리 안 하고 열심히 다닌 아이의 꾸준함, 참을성을 칭찬해 줄 수도 있었다. 아니 그래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난 꼭 아이가 나 자신이라도 된냥 아이를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 나 있었다.
그렇게 큰 아이는 엄마의 자질이 부족한 내 곁에서 긁히면서 성장해 갔다. 성취도에 비해 약간씩 자신감이 결여된 아이로. 자신 안에 있는 작은 빈틈 하나를 쫒는 시선을 지닌 아이로 자라났다. 엄마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을 그대로 따라가는 아이를 보며, 난 그제야 내가 틀렸었다는 걸 깨달았다. 미숙했던 엄마인 나는 마치 별 모양 아이의 뾰족한 부분을 갈아서 둥글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듯이 그렇게 공을 들였다. 별을 깎아 흔한 원을 만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한참 뒤에 태어난 작은애한테는 묘하게 넉넉했다. 내가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넓어진 건 아니었다. (내 경험으로 보자면, 마음은 나이와 비례해 저절로 넓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다락방에 쌓인 물건이 늘어나듯이, 살면서 쌓인 감정으로 마음 공간이 점점 비좁아지기도 한다. 적어도 난 지금보다 어렸을 때가 더 착했다.)
큰 아이 키우느라 지친 걸까. 포기한 걸까. 어차피 애쓴다고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그 사이 알아버린 탓일까. 어쨌든 굳이 이 아이라는 퍼즐을 놓고 빈틈없이 빼곡하게 채워 넣어야겠단 발상 자체가 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아이를 완성형 퍼즐 맞추기로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아이의 모양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됐다.
그즈음 내가 제일 많이 하고 다닌 말은 "네가 알아서 해라"였던 것 같다. 단 하나, 살면서 크게 다가왔던 선택의 중요성, 그 선택을 직접 할 기회를 많이 주고 싶었다. 선택에 따른 책임도 느끼도록 했다. 그렇게 아이와 나는 각자의 영역을 지키게 됐다. 같은 엄마한테서 자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두 아이는 지금도 생김새도 재능도 하다못해 성향도 취향도 다르다.
예리한 큰 아이는 그 차이를 분명하게 알아챘다.
"엄마는 내가 올백받았을 때도 잘했네. 한마디 하시더니 동생은 어쩌다 한번 잘해도 칭찬을 너무 잘하시는 거 아니에요? 게다가 동생은 왜 그렇게 자기 뜻대로 다 해요?"
"............" (미안하다. 사랑한다. 아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아주 조금은 성숙해진 것 같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큰아이 키울 때 하던 시행착오를 또 하고 있었다. 큰 아이를 보던 시선으로 내 글을 바라본다. 돋보기를 갖다 대듯이 내 글의 단점만 들여다본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꾸 빈틈을 찾아낸다. 발전을 위해 단점을 보완하려면 글의 단점을 짚어보는 자세도 필요하다. 그런데 지나치게 빈틈을 쫓는 눈길은 위축만 불러일으킨다. 내 글이 쪼그라드는 게 느껴진다. 학창 시절 검은 종이에 돋보기로 햇빛을 모아 종이가 타들어가던 실험이 생각난다. 내가 쓴 글의 종이가 타들어간다. 그 따뜻한 햇볕도 과하면 종이를 뚫어지게 할 뿐이라니. 왠지 과한 눈초리에 시달린 큰 아이에게 미안했듯이 내 글에 측은한 느낌이 든다.
애초에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와서 얘(내 글)가 나온 건데 왜 자꾸 얘를 미워하나 싶다. 이런 태도는 나도 글도 서로 피폐해질 뿐이었다. 급기야 서로 미워하게 된다. 나는 글을 보며 "넌 이 대목이 왜 이 모양이나?'하고, 글은 나한테 '넌 어째 그 나이 들도록 기억 속에서 마음을 울리는 에피소드 하나 못 건져내니?'라고 서로 탓한다. 어느 날은 내가 쓴 글을 정리하며 읽다가 꼴 보기 싫어 노트북을 쾅 닫아버리기도 했다.
되돌아보면 20대에 뾰루지 하나만 생겨도 그 뾰루지에 엄청 신경을 썼던 것 같다. 급기야 내 얼굴엔 뾰루지만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얼굴을 찌푸리게 됐다. 결국엔 뾰루지보다 찌푸린 표정이 더 눈에 거슬리게 된다. 뾰루지가 사라져서 어두운 표정이 살아날 즈음이면 다크서클이 또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다시 다크서클이 눈에 거슬려 찌푸리며 세월은 흘러간다. 40대에 이르니 다크서클 대신 기미가 하나둘 올라왔다. 단점에 매몰되며 인상을 쓰면 단점보다 찌푸린 표정이 눈에 거슬린다.
아이의 단점이나 내 글의 문제점이나 전체 모습 안에 문제가 하나 들어온 것뿐이지, 전체가 문제는 아니었는데 너무 문제에 매몰돼 지냈다. 뾰루지가 난 얼굴로도 웃어 보일 수 있어야 했는데 뾰루지 하나로 온통 얼굴을 찡그리고 다닌 꼴이다. 뾰루지가 얼굴의 일부이듯 문제도 내 글의 일부일 뿐이다. 뾰루지나 다크 서클, 기미에 신경 쓰느라 표정이 어두워지는 게 피부 자체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손해였다. 글의 단점만 신경 쓰다 보면 글을 쓰는 자체에 흥미를 잃고 글이 생기를 잃곤 했다.
완성된 모습을 향해 단점을 파헤치면서 극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긍정하며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아끼고 사랑하는 것.
단점 보완과 더불어 존재에 대한 긍정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
그런 태도가 바탕에 깔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
그 당시에는단점을 극복하느라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보다 단점과 함께 미소 지을 수 있는 여유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지 못했다.
내가 내 아이를 존중해야 다른 사람도 내 아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처럼, 내가 내 글을 사랑해야 내 글도 사랑스러워질 것이다. 그런 의도적인 태도 교정이 아니라 해도 내 아이가 예쁜 건 당연한 거다. 내 아이가 예쁜 건 내가 낳았기 때문이다. 내 글도 내가 썼으니 그냥 어느 정도는 좋아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내 삶, 내 생각, 내 감정 자체인 내 글을, 내가 품어주고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누가 그렇게 할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제부턴 난 내 글을 아이 대하듯이 대하려고 한다. 부족한 부분은 인정하고 보완하려고 노력하겠지만 굳이 그 부분에 집착하며 찌푸리지 않으려고 한다.
그냥 내가 '나'이듯이 내 글도 '내 글'일뿐이니까.
2020년이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올해, 제 브런치를 방문해서 글을 읽어주신 분들, 지속적으로 관심 가져 주신 구독자분들 모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덜 나는 크리스마스지만 그럼에도 마음의 행복은 잘 가꾸어 나가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