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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Apr 12. 2021

나쁜 남자에게서 벗어나는 법

글쓰기가 괴로울 때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내 안에 차오르는 무언가를 뿜어내야 할 것 같아서였다. 몇 년 전, 인생의 허무가 짙게 밀려왔다. 그 지독한 허무감은 쉽게 증발하지 않았고 일생을 괜찮은 척하며 덮고 살던 내게도 증상이 찾아왔다. 괜찮은 '척'의 한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애써 이해한 척 넘긴 일들이 거름망에 하나씩 끼면서 막히기 시작한 걸까. 배수구 거름망이 막히니 가슴의 입구는 갑갑하면서도 그 속은 텅 빈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물이 통과하지 못해서겠지.


텅 빈 느낌이 꽉 차오른다는 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문장으로 담아 봤다. 내 안에 무언가를 그려내야 했다면 아마 조금 수월했을 것이다. 내가 그려야 할 것은 내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걸 적어 내려가자니 쓰고 나면 더 바닥에 주저앉은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주저앉아 바닥을 매만지고 나면 위안이 됐다.


되돌아보면 나의 글쓰기는 늘 주기적 사이클이 있다. 내가 보기엔 시간과 비례해 꼭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퇴보할 때도 있고 정체할 때도 있다. 지금도 내가 쓴 글을 죽 보다 보면 시기별로 그 당시 글을 대하는 내 태도가 뿜어 나온다.  주로 아래 세 단계를 주기적으로 돌고 있다 (언제쯤 안정될지;;)


나와 글, 오롯이 둘만의 시간           


이 시기의 글들은 날 것 그대로다. 내 경우엔 이때 내 안의 불순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납득할 수 없는 것들, 떠밀려 흘러 온 것들에 대한 억울함이 차올라서였다. 그래서인지 이 시기의 글들을 읽고 있으면 어렸을 때 주택에 살 때, 물탱크 청소 뒤 수돗물을 튼 것 같다. 한동안 녹물이 콸콸 나온다. 그렇다고 꼭 녹물 가득 담은 글이 부끄럽지만은 않다. 이 시기의 글은 나와 밀착도가 가장 높다. 그 당시 내 안에 있었던 물이 그랬기 때문이고 그게 나인 게 사실이니까. 최소한 이때 글을 읽고 있으면 '나 이때는 참 진실했지'라고 자랑스러울 때도 있다. 이렇게 글과 나를 밀착하고 써 나가다 보면 어느새 녹물은 잦아들고 맑은 물이 나온다. 그즈음  문득 내 안에 '욕심'이 생기곤 한다.


글쓰기가 '나쁜 남자'와 연애하는 것 같은 시기      


어느덧 글 자체의 완성도에 욕심이 나는 시기가 찾아온다. 이 시기엔 글을 꾸민다. 뿜어 나오는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담지 않고 통제하려는 생각으로 누르고 조인다. 코르셋으로 조이고 브래지어로 부풀린다. 자연스러운 볼륨의 여성미가 아니라 교정 속옷을 입은 인공미가 뿜어 나온다. 글 하나 쓰는데 구조물을 세우는 듯, 철심이 들어간 보정 속옷만 몇 개를 덧입는다. 그 뒤 "나 예쁘지?"라고 웃어 보이지만 사실 별로 매력이 없다.   


이 시기의 글을 읽어 보면 내 글이 낯설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대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머릿속으로 원하는 글에 맞춰가기 때문이다.  내 글이 나답지 않게 흘러간다. 글을 쓰는 과정이 나쁜 남자에 휘둘려 연애하는 것처럼 변한다. 연애를 할 때, 가장 이상적인 만남은 나를 나답게 하는 상대와의 만남이다. 나쁜 남자와 연애하면 자꾸 상대방에 맞추게 된다. 연애를 하는데도 얼굴이 피어오르지 않고 시들어 간다. 내 민낯은 보여주려 하지 않고 자꾸 화장만 짙어간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나다움을 잃지 않는 것인데... 그럼에도 '나'보다 '더 멋진 나'를 만들어 내려한다.


나보다 상대방(글의 완성도)에 비중을 더 두기 때문에 마음에 중심을 잡을 수 없다. 나쁜 남자와의 연애가 치명적인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없게 하는 데 있다. 글쓰기가 나쁜 남자와의 연애가 되면 내가 내 글을 사랑할 수 없다.  내 글을 사랑할 수 없다는 건 나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글쓰기가 즐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그만둘 수도 없다.  글쓰기도, 나쁜 남자도 확신을 주지 않으면서 선을 딱 그어 단념시켜주지도 않는다. 불확실성과 갈증, 이따금씩 주어지는 희망, 글을 쓰고 난 뒤 느끼는 충만함이란 잡아끄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대로 불투명한 미래에 갇히게 된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왜 이런 구조가 생겼을까? 글쓰기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나쁜 남자를 파헤쳐 본다.

나쁜 남자와  연인의 관계는 평형 구조가 아니다. 이상적인 관계는 평형 구조인데 반해 나쁜 남자와 연인을 하게 되면 묘한 갑을 구조에 갇히게 된다. 그 앞에만 가면 한없이 작아지는 을의 형태는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갑은 많이 가진 사람, 을은 적게 가진 사람? 그렇지 않다.

세상에 바라는 게 없는 사람은 누구 앞에서든 을이 되지 않는다. 워런 버핏이 눈앞에 지나가도 그와 밥을 먹을 생각이 없으면 그는 내게 갑이 아니다. 중국 거부 마윈을 만나도 그의 돈을 받을 생각이 없으면 을이 되지 않는다.       


관계의 당당함과 초라함을 나누는 기준은 '바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 '로 갈린다.   

나쁜 남자는 기본적으로 당당하다. 그는 여자의 사랑을 애써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는 나쁜 남자의 사랑을 원한다 (즉 글이 완성도 높기를 바란다). 원하는 게 있는 사람, 저절로 을이 된다.

이 만남에서 시간이 갈수록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어지는 나쁜 남자는 영원한 갑,

더 더더 바라는 여자는 영원한 을이다. 이 구조를 벗어나려면  바라는 마음을 벗어던져야 한다.    


'많이 사랑하는 것'과 '바라는 게 많은 것'은 다르다. 상대방을 많이 사랑해도 상대방에게 바라는 게 없으면 을이 아니다. 바라는 것을 내려놓는 순간, 나쁜 남자로 있던 글에게서 갑의 기운이 빠져나갈 거다. 을이 없는 갑은 없으니까. 내 안의 욕심이 글 쓰는 시간을 나쁜 남자와 연애하는 순간으로 만든 것이다.


앗 어디선가 들려온다. "그러는 너는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나?" 물론 아니다. 나도 욕심 가득하다. 그러니 이 글을 쓸 수 있는 거다. 투병일기처럼. 내가 아픈 경험을 쓰는 거다. 


사실 바라는 게 없기는 힘들다. 그래서 바라는 시점을 바꿔 봤다. 결과적으로 잘 쓰는 것을 바라기보다 과정적으로 진실하게 쓰는데 초점을 옮겨 봤다. 완성된 글이 멋지기를 바라는 시점으로 글을 자꾸 바꾸다 보면 '나'를 잃고 나에서  멀어지곤 했다(글은 여기 있는데 나는 어디에? 하는 글들이 내게는 있다. 부끄럽다). 대신 과정적으로 이 글에 담긴 문장 하나하나가  나를 진정성 있게 흡수하고 있는지 살피는데 초점을 두려고 노력 중이다. 혹시나 애써 조이거나 부풀리진 않았는지 점검하면서 말이다.


많이 사랑하고 많이 표현한 사람은 사랑이 끝나고도 후회가 없다고 한다. 그저 많이 사랑하려고 한다. 그렇게 사랑하다 어느 날 떠난다 해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이 시기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면 또 다른 시기가 온다. 나와 글 사이에 끼어드는 침입자가 생긴다. 

바로 독자다.               


나와 글 그 사이에 독자가 서 있는 시기


이 시기에 쓴 내 글을 읽다 보면 마치 연극무대에 선 초보 배우 같다.  연기에 몰입한 배우가 아닌 관객을 의식하는 배우, 연기를 하면서 관객과 눈을 맞추고 관객의 반응에 민감하다. 관객은 몰입한 연기를 보러 온 것일 텐데 배우만 관객과 직접 소통하려고 자꾸 눈을 맞춘다 (이 얼마나 우스운 상황인가). 연극 무대에서 가장 훌륭한 배우는 극 자체에 몰입한 배우다.     


난 관객을 보며 관객의 반응에 시시각각 민감하게 대응한 배우였을 뿐이었다. 잘 쓰고 싶기보다 잘 쓴다는 말을 듣고 싶으면 독자의 반응 하나하나에 매달리게 된다.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 진다. 독자의 미세한 떨림에 지진이 온 듯할 때도 있다. 그러다 글을 쓰고 독자를 살펴보는 게 아니라  독자에 맞춰 글을 써보기도 한다.


'이런 주제로 글을 쓰면 아마 반응이 없을 거야.'

'얘. 너무 우울해. 화창한 봄날 이렇게 우울한 이야기를 쓰면 어떡해?'

'이 부분을 독자가 읽다가 놓치면 안 돼. 굵은 글씨체를 넣어야지 (어떤 글은 굵은 글씨가 더 많기도 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수시로 저지하는 마음이 파고든다.'네가 글 쓰기에 대해 말할 위치는 아니잖아?'

다행히 또 다른 내가 날 방어한다. '현재 내가 괴로운 글쓰기에 대해 쓰는 거잖아. 이 정도는 괜찮아.'


독자의 예상 반응 하나하나를 짚어보고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한다. 흘러나온  말 토씨 하나를 모스부호처럼 붙잡고 파고든다.  글을 잘 쓰려고 하는 것과 독자에게 잘 쓴 글로 보이려는 글은 좀 다르다. 그냥 나와 내 앞의 백지 사이를 밀착시키고 그 안에 나를 빠뜨려야 하는데  나와 내 앞의 백지 사이에 독자가 끼어들면 자꾸 기웃거리게 된다.    


왜 독자를 의식할까?  독자가 없는 저자란 의미 없기 때문에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전에 엘렌 길크리스트의 문장을 읽은 기억이 난다.

" 작가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다른 수입원을 찾는 것이다."

돈벌이에서 벗어난 글쓰기가 독자로부터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업작가 중에도 이런 시각에서 벗어나 자신의 글을 쓰는 분들도 많다. 그들은 나와 다른 세계사람이라 논외로 하겠다).

무대에 서서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연기에 몰입하는 배우처럼 그렇게 글을 쓰고 싶다 (이런 이유로 관객석 주변을 소등하듯이 간혹 댓글창을 닫아두려고 합니다.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나쁜 남자에 휘둘리지 않고 글 자체를 사랑하며 글을 쓰고 싶다. 이 나이에 나쁜 남자와의 연애는 피하고 싶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나와 글을 밀착시키고 내 안의 녹물을 빼내는 작업을 하고 싶다. 그리고 그 녹물을 빼내고 나면 말간 색을 띠는 물로 쓰고 싶다.

내 글이 독자들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었으면 한다. 그날이 오기까지.




앗 한 가지 덧붙입니다. 전 나쁜 남자와 연애한 적은 없답니다. 가만히 있어도 나 좋다는 이성 사람이 많아서(죄송), 관계에 머리를 쓰는 사람을 워낙 싫어해서(까칠), 나쁜 남자까지  관계망에 담지 않아도 됐어요. 

상대방이 밀당을 하나 싶으면 바로 관계의 끈을 끊곤 했으니까요.

대신 친구들 연애상담을 많이 한 관계로 나쁜 남자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는 거랍니다.

(아닌 것 같은데? 직접 경험한 거 아니야 하시는 분. 믿고 삽시다^^  믿으면 복이 와요^^)


                                                       

                                                                                                     <사진 출처: 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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