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월 22일이네요. 보통 2월 22일 하면 '아 벌써 1월 1일부터 한 달 하고도 22일 지났구나.' 할 텐데요. 제겐 다른 기준이 생겼어요. 오늘로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한 지 석 달쯤 되는 날이에요. 작년 11월 중순, 크리스마스를 한 달 여 앞두고 트리를 꺼내놨어요. 즐거운 분위기는 미리 잡아당겨 최대한 늘어뜨려 즐기자는 의미로 한 달 전부터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곤 하거든요. 대신 크리스마스 지나고 나면 바로 정리하는 편이에요. 2018년은 은색톤, 2019년은 분홍색 톤, 작년에 빨간색톤으로 장신구만 바꿔가며 트리를 장식했어요.
12월 26일, 트리를 정리해야 하는데 그즈음 일이 많았어요. 일하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크리스마스트리,
'저 장신구를 언제 다 떼서 하나하나 닦아 상자에 넣지?'
'해? 말아? 해? 에잇'
결국은 크리스마스트리를 번쩍 들어 발코니에 옮겨 놨습니다. 이렇게^^
쫓겨난 크리스마스트리와 올해의 포인세티아 저 상태로 일 년 여를 보내다 올 11월 25일이 되면 다시 거실 안쪽으로 불러올 참이에요. 너무 게으르다고요?
인정합니다. 전 집안일 중 정리를 제일 못 해요. 살균, 먼지 제거는 매일 하는 대신 (타고난 체질상 먼지 알레르기가 있어서 어쩔 수 없어요) 제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것들은 그냥 놔두곤 해요. 마치 그들에게 자유를 허한 것처럼. '오늘 너희가 머무른 자리가 바로 너희가 있어야 할 곳'이란 듯 곳곳에 길 잃은 책들을 그냥 놔둬요.
12월 말에 쫓겨난 크리스마스트리가 저 상태로 두 달째에 이르자 묘한 감정이 일어났어요. 분명 같은 크리스마스트리인데 시간이 갈수록 다른 느낌을 전해 오더군요.
11월에는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바라보는 제 시선에 설렘이 더해지곤 했어요.
12월 24일에는 그 설렘이 기대라는 옷을 벗고 기쁨과 흥분을 안고 있었어요. 불빛까지 더해져 반짝반짝했죠.
12월 25일이 지나고 1월, 발코니로 쫓아낸 트리를, 마치 사랑이 식은 연인을 보듯이 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더군요. 발코니가 추운 데다 제 싸늘한 시선까지 더해져 아마 더 추웠을 거예요.
2월이 되자 저 트리를 볼 때마다 헤어진 애인이 집 앞에 찾아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요.
'너 왜 아직 그러고 있어?'
대상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데 변하는 것은 나의 시선이라는 걸 (글로만 읽다가) 직접 체험하게 됐어요.
지구가 공전하며 우리나라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만들어 놓고 나서,
가을에 들어서자 '넌 왜 푸르르지 못하고 빨갛게 변해 낙엽이 지냐?'라고 가을을 나무라는 것처럼요.
애초에 움직인 건 지구가 먼저인데 지구가 가을 낙엽을 나무라면 안 되는 거죠.
저를 둘러싼 관계에서 서서히 변하고 있는 것은 나와 나의 시선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어요.
지금까지 그들이 변했다고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제 시선도 같이 움직인 거더라고요. 회전목마를 타고 걸어가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요. 제가 이동하는 속도를 느끼는 것, 의미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상대방의 크게 웃는 모습을 보고 호탕하다 느꼈다면 제가 조용한 걸 더 선호하게 되면서 그 웃음소리가 거슬리곤 했어요. 전에는 상대방의 신중함을 사려 깊다고 여기다가 제가 즉흥적인 면이 늘어나면서 요즘엔 상대방이 추진력 없다고 느껴지기도 해요.
남편한테도 그렇네요. 전에는 제가 드라마 보고 있을 때 방에 있던 남편이 거실로 나와서,
"저 사람 왜 저러는 거야? 저 둘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데?"라고 물어보면 조곤 조곤 알려주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이 얘기 저 얘기도 했어요. 그런데 점점 드라마 시청하는 동안 남편이 물어보는 게 방해가 되더라고요.
"현빈이 북한에서 내려왔어? 언제?"
이러면 보고 있던 현빈 얼굴이 가려지는 게 갑갑해요; 꼭 몰입하고 있을 때, 끼어들어 물어보거든요.
남편은 드라마를 보지 않아요. 방안 어딘가에 있다가 재미있는 장면 나올 때면 기다렸다는 듯 절묘한 타이밍에 거실로 나와서 제게 물어보곤 해요;; 예전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려 이야기해줬을 텐데 요즘은,
" 당신, 세계문학전집도 요약본으로 읽었지? 왜 줄거리만 알고 싶어 해. 궁금하면 시간을 내서 봐야지"라고
콕 찌르기도 해요.
특히 행복하고 달콤한 장면을 흡수하고 있을 때 방해하면 맛있게 밥 먹다가 말고 젓가락 내려놓고 일어나야 하는 것처럼 흐름이 끊겨 맥이 풀려요. 드라마와 영화는 해피앤딩을 선호하는 저는, 그 시간이 행복 충전시간이거든요.(뭐 그렇다고 일상이 영 불행하단 건 아니에요^^) 다만 마음 졸이고 저린 이야기를 보는 것보단 행복한 이야기가 더 끌릴 때가 있어요. 에스프레소를 마시다가 캐러멜 마끼아또를 마시고 싶은 날이 있듯이, 달달한 무언가를 보충해 주어야 할 때가 주기적으로 오거든요. 중년의 하루가 씁쓸한 아줌마에겐 달콤한 이야기가 감정 보충제랍니다) 아... 이야기가 중간에 샜네요 ;;;
제 시선의 변화를 느끼면서 문제 원인을 밖에서만 찾던 버릇을 고칠 수 있으리라 기대해요. 감정이나 생각을 결론짓기 전에, 밖과 안으로 두 번 살펴보는 거죠. 살면서 제 경험을 바탕으로 내린 결론들, '생각의 결론'부터 '감정의 응집'까지 다시 한번 되짚어봐야겠어요. 손전등을 들고 지하 창고에 내려가듯 조심스레 제 안을 비춰보려고요.
결론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마다 잘못 이어진 곳은 없는지, 건너뛴 곳은 없는지. 이상한 방향으로 튕긴 건 없는지 되짚어 볼까 해요. 사실 제 안에는 왜곡되고 편집된 채, 단단하게 굳은 생각과 매듭지어진 원망과 미움이 많아요. 저 발코니 서랍장에 넣어놨어요^^ 제가 결론을 잘 짓는 성향이라서요. '저 사람은 이상해. 저 사람 이래서 싫어.'이런 마음이 서랍 속에 있어요.
당당하게 미워해도 마땅하다고 여겼던 일에서 저의 변수가 차지하는 비중을 읽어보려고요.
상대방이 이래서 미워한 게 아니라, 이미 미워져서 이러이러한 점을 애써 찾은 건 아닌지 되짚어야겠어요.
또한 상대방이 이상하다고 단정 지었던 것들, 나 또한 변해서 더 크게 느끼는 건 아닌지 살펴보려고요.
그동안 제게 설득력을 부여했던 생각과 감정 중에서 편견과 왜곡을 하나씩 건져 올리는 순간, 그만큼 저는 바로잡아진다 믿어요. 제가 자동차는 아니지만, 지금 저는 시속 몇 KM가 아니라 연속 몇 M로,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그 방향이 원하는 쪽인지 느껴보렵니다.
시선의 이동과 관련해 또 하나의 바람이 있다면 장식장 서랍 안 마스크를 저 발코니에 있는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볼 날이 빨리 왔으면 해요. 분명 작년 이맘때만 해도 마스크를 볼 때 제 눈에 '귀함'이 가득했거든요. 이제는 '귀함'은 사라지고 '필요함'만 있네요. 언젠가 '쓸모없음'의 시선을 마스크에 던질 날이 오겠죠? 마스크를 보며 '너 쓸데없이 왜 이리 많아?'라고 차갑게 돌아설 날을 기대해 봐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마스크를 벗어 위로 던지는 광경, 상상만 해도 벅차오릅니다.
<사진 출처: 픽사 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