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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Jun 01. 2021

어느 봄날, 한 밤의 수다

플러그를 뽑고

노트북이 고장 났다. 정확히는 C 드라이브가 고장 나서 저장했던 글들이 다 사라졌다. 그동안 USB애 저장했던 글들은 옮겨왔는데  USB에 저장하지 않은 글은 회복 불가능했다.  열흘 전부터 이상신호가 떠서  USB가 고장 난 줄 알고 저장을 미뤘더니 C드라이브 고장이라니! 결과적으로 한 열흘 치 쓴 글이 사라져 버렸다.


오전에 다시 써보려고 할 때만 해도 내 머리의 한계를 느끼며 좌절감에 빠졌다.

오후로 접어 드니 왠지 편안해지면서 '그래. 쉬라는 신호일지도 몰라. 몇 달 전부터 쉬고 싶었잖아. 쉬어!'라는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내가 만들어낸 소리겠지. 어째 이런 방면으로만 능력이 느는 느낌이다).


카톡 창을 열었다. 친구 목록을 죽 훑어 내려간다. 그러다가 눈길이 머무는 친구가 있다. 클릭~!

"뭐해?"

"그냥 있지... 이따가 아이 학원 보내고 밤에 잠깐 볼까?"

"응. 그럼 거기에서 만나"


평소에 미리 약속을 잡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일을 제외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백지상태에서 그날 일정을 그날 정하며 생활하는 걸 즐긴다. 물론 부득이한 모임은 미리 약속을 잡지만, 친한 친구와 일대일 만남은 주로 당일 오전에 연락해 만나곤 한다. 미리 약속을 해 놓으면 '만나고 싶다'가 '만나야만 한다'로 바뀌곤 하는데 그게 참 씁쓸하다.  이런 핑계로 즉흥적으로 만남을 유지한 지 꽤 됐다 (비슷한 성향의 친구들이 있어 가능했다).


저녁 식사 뒤, 정리하고 나서 서둘러 옷을 입고 소지품을 챙긴다.  마지막에 눈길이 닿은 건 휴대전화.

잠시 물끄러미  바라본다. 꼭 들고 다니던 휴대전화. 하다못해 깜빡 잊고 놓고 나가면 다시 집에 들어와 챙겨나가던 휴대전화를 문득 떼어놓고 나가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살포시 소파 위에 놓고 매정하게 뒤돌아섰다. 휴대전화를 놓고 나가는 길, 왠지 아이 어렸을 때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외출하는 것처럼 불안했다.


  이 참에 전자파 해독을 하는 거야.

그렇게 나와서 몇십 분쯤 지났을까. 점점 내 몸의 플러그를 뺀 기분이 든다. 내 몸의 누적돼 있던 전자파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듯. 하루 종일 휴대전화와 노트북으로 연결된 일상. 플러그를 뽑지 않은 전자제품이 된 것 같았다. 잠시 플러그를 빼고 정보단절을 시도하고 싶어 졌다.


'내가 좀 늦었어?"

"아니야. 나도 금방 왔어."

도착 뒤 친구 얼굴을 보자마자 말을 건넴과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향한다. 서서히 걷기 시작한다. 같은 방향을 보며 걸으면서 하는 대화는 때로는 혼잣말 같기도 하고 때로는 허공을 맴돌다 돌아오는 메아리 같기도 하다.


'좀 앉을까?'  


                  

용건 없는 만남이 좋아

나이 들수록  용건이 없는 만남의 소중함이 점점 진하게 다가온다. 만나서 서론이 끝나고 나면 슬며시 드러나는 본론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목차도 없고 본론도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대화를 이어가는 이 시간이 좋다. 이럴 때면 내가 말하면서 내 생각을 처음 알게 되곤 한다.  마치  음성으로 초고를 쓰는 것도 같다.


"난 말이야. 요즘 참 편해. 전에는 남편한테도 아이한테도 지나치게  관심이 많았거든. 그런데 이젠 그 관심이 많이 줄었어. 자유로워."

역시나  먼저 말을 시작한 친구의 말은 내가 요즘 생각하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그래. 누군가를 너무 많이 싫어하면 내 마음이 감옥으로 변하잖아.... 너무 좋아해도 난 힘들더라.

조금씩, 넓게 좋아하며 누리는 마음의 자유, 평온이 좋아."

"그래. 관심을 애써 줄이는 게 아니라 관심이 저절로 줄었달까. 서로에게 잘 맞춰진 거라기보다 서로 안 되는 건 안된다 체념하게 된 거지. 이해와 수용이라기보다 그냥 예외 법칙 외우듯이 외우고 넘겨버리게 돼. "

" 맞아. go의 과거 went인 것처럼. 왜 goed가 아니냐고 따져봤자지 뭐."
" 어쩌면 사랑이 연해져서 자유가 커진 걸 수도 있겠네. 연한 사랑 좋아. 이제 우리 나이에 에스프레소는 심장에도 무리야. 연하게~ 아주 연하게 맹물만 아니면 됐지 뭐."
" 맞아. 전에 만났던 내 지인은 남편을 너무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이혼한다고 하더라.  차라리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렇게 상처를 크게 받지 않았을 텐데 하면서 말이야."
" 그러고 보면 정이 쌓이면서 좋은 점도 있지만  정이 떨어지기도 하면서 편해지는 면도 있는 것 같아. 쌓이고 떼이고 하면서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포기할 건 포기하며  편안한 지점을 찾아 비로소 자리 잡나 봐."


      <한 배에 탄다는 건 방향을 통일해야 한다는 것>


"결혼... 두 사람이 한 배를 타고 계속 한 방향으로 통일해 나아간다는 건 쉬운 건 아니야."
"그럼 쉽지 않지. 오죽하면 넬슨 만델라도 27년의 수감생활을 견디고 나서 석방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했을까. 결혼생활은 고난도 중 고난도야."

"진했던 사랑이 연할 데까지 연해지고 난 뒤에도 이어지는 결혼생활의 의미는 뭘까?"
"결혼생활은 나란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과정 같아. 나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부터 가장 추한 모습까지가 결혼생활로 구석구석 드러나는 걸 느껴.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맞닥뜨리게도 되고 말이야. 또 그 모습이 상대방의 기억을 통해 다시 내게 비치기도 하더라고.  결국 나의 과거를 공유한 그는 그일 수도 있고 나의 과거일 수도 있는 것 같아. "
"그럼 우리가 잡고 있는 게 결국 상대방이 아닌  '과거의 나'인 걸까?"
"물론 그것만이 다는 아니지만 그것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사실 그에 스며들어있는 나를 붙들고 있는 건지도 몰라."

"그래 어쩌면 그럴 수도..... 내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는 생각 때문에 자꾸 내가 더 손해니 억울하니 안 알아줘 섭섭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같아. 그래서 절대로 완벽하게 쿨해질 수 없는 관계지. 서로 뒤엉켜있는...."

"사실은 상대방을 향한 내 노력과 시간을 투자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데.... 그게 말이 그렇지 쉽게 되나."



  <그 시간, 강물은 우리의 시간처럼 흐르고 있었다. 친구의 얼굴도 저 강물처럼 잔잔하고 평온해 보였다>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관계. 어쩌면 강물에 비친 다리처럼 서로의 모습을 투영해주는 관계인지도 모른다.

다만 나로부터 시작된 시선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기에,  서로를 잘 비춘다고 착각하면서도 

어쩌면 반대방향의 모습으로 비칠 수밖에 없는 숙명이기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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