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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Jan 08. 2021

타임머신 하나 그리고 둘

우리의 소중한 하루를 저장하는 방법

제겐 타임머신이 있어요  


손바닥만 한 크기에 16그램 하는 무게

동그란 모양의 타임머신 한대당 목적지는 한 곳이에요

특정 시점으로 돌아가는 일련번호가 새겨있어요


이 타임머신은 1990

이 타임머신은 2000

이 타임머신은 2007


단, 이 타임머신은 조심스레 다뤄줘야 해요

손으로 만진 흔적을 남기면 안 돼요


언제든 내가 원하는 과거의 지점으로 나를 데려다주는 이 타임머신은

성능이 좀 제한적이긴 해요

50년 전은 작동 안 되고 30년, 40년 전 특정 기간에는 도달할 수 있어요


가끔 연착을 하기도 하고 결항이 되기도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네요

대신 일단 출발하면 정거장 없이 직항이에요


이틀 전, 눈이 오던 밤

2000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에 가 닿고 싶었어요

서랍장을 열고

2000년으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을 꺼내요


김광민 3집 <보내지 못한 편지>를 꺼내서

'설렘'이란 곡으로 들어가요 (앨범에는 설레임이라도 잘못 표기돼 있네요)


CD테크에서 CD가 돌아가면서

저도 2000년으로 돌아가요


2000년 여름, 쨍하던 햇살이 찌르듯이 따갑던 날

내 마음속까지 햇살이 투영되곤 했죠

나를 훤히 비춰 보이는 햇살에 비로소 나를 오롯이 '내 시선'으로 보게 됐어요


2000년 가을, 햇볕은 습한 빨래를 말리듯이 나를 말렸어요

쓸데없는 물기가 빠져버린 버석한 나로 저벅저벅 걸어 다녔죠

햇살은 그런 내가 대견했던지, 내게 그림자를 붙여 주었고 그림자는 나를 따라다니며 지켜주었어요


2000년 겨울, 해를 가리면서 눈이 쏟아지더군요

비는 흩어짐이고 눈은 결집이에요. 모든 건 뭉침으로 이루어지잖아요

기대에 차서 나가 뽀드득뽀드득 걸었어요 그리고 철퍽철퍽 돌아왔어요


눈이 비가 됐거든요





좋아하는 음악이 생기면 아직까지 CD를 사서 듣곤 해요. 요즘엔 구할 수 없는 것도 있더군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어요. 중학생 때부터 모은 LP판이 대학생 시절 백여 장 됐던 것 같아요. 그리고 CD로 전환, 얼마나 모았는지 알 수 없어요. LP보다 CD가 보관이 더 어려웠어요. 부주의 탓이겠죠.  CD를 사면 좋아하는 트랙을 무한 반복해 듣는 편이에요. 길게는 몇 달, 짧게는 몇 주. 그러고 다시 CD 케이스로 돌려보내곤 해요.


한참이 흐른 뒤 그 음악을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으면 그 음악을 듣던 시기로 돌아가게 돼요.(산발적으로  이 음악 저음악 듣던 시기는 타임머신 결항됩니다^^)

그 음악에 스며들었던 그 시절 나의 감정, 나의 생각, 나의 고민이 선율과 함께 선명하게 뿜어 나와 흐르죠.

제게 CD 한장은 그 CD를 즐겨 듣던 시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입니다.


1980년대는 조동진, 어떤 날, 들국화

1989년엔 Stan Getz의  the girl from ipanema을 들으며 나른한 느낌에 빠져들었고

1990년엔 Barry Manilow의 When October goes를 들으며 낙엽을 밟았네요.


오늘은 일하다가 쉴 때, 몇 년도로 돌아가 볼까? 생각해요.

지난가을에 1990년대에 머물러 있었거든요.

먼 훗날 힙합을 들으면 2020년이 생각날 거예요. 작년 내내 작은 아이의 취향에 맞춰 차 안에서 들었으니까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돌아갈 페이지가 늘어나네요.

그만큼 풍요로워진다는 의미였으면 합니다.


나이만큼 낡지 말고 겹겹이 채워갔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문득 제가 쓰는 글 또한 cd와 함께  또 하나의  타임머신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어쩌면 지금 쓰고 있는 글 하나하나가  이십 년 뒤 삼십 년 뒤,  우리의 타임머신이 돼  우리를 지금 이 순간으로 데려다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봐요. 그래서 지금 떠오르는 과거의 추억, 지금 스며드는 현재의 감정을 오늘도 적어 내려가요.

다가오는 미래에 타임머신으로 돌아올 과거를, 오늘을 살며 만드는 거죠. 제대로 살고 그대로 느끼며 더 잘 만들고 싶어요.


지난 글들을 읽어보니 'CD 타임머신'보다는 '글 타임머신'이  그 당시 감정, 생각을 완벽히 재현하는 데 부족함이 많네요. 때로는 가고 싶은 곳이 아닌 외딴곳에 가 있기도 하고요.^^ ('여기가 어딘가?' 하는 글들이요)

멋진 곳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순간 내 발길이 닿은 곳을 담아내는 것, 그런 진솔함이 낯선 곳으로의 착륙을 막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 당시 그 감정에 제대로 안착할 수 있는 것, 글 타임머신으로 보완해야 할 점인 것 같아요.  


지난달과는 또 다른 이번 달의 생각과 행동을 하나씩 덧 입혀가며, 타임머신의 노선을 좀 더 확장해 놓는 것도 의미 있을 거예요. 더 나이 들어서는 타임머신 여행을 더 자주 하고 싶어 질지도 모르니까요.

두려워하지 말고 오늘 삶의 폭을 넓히고, 게을리하지 말고 오늘 삶의 깊이를 더하며,

꽉 채운 오늘을 담아내려고 합니다. 좀 더 정밀한 타임머신의 탄생을 위해.

오늘도, 올해도, 저의 타임머신과 함께 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틀 전  만든 눈사람이에요^^ 그날 눈이 유난히 잘 뭉쳐지더군요. 여러분의 소원도 꼭 잘 이뤄지시길 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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