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무도 Nov 14. 2020

같은 상황 다른 해석 1

상황을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상황의 모습

 20대에는 친구들 연애상담을 참 많이 했다.

"결혼할 남자만 사귀어라"는 엄마의 조언에 따라 (사귀어 봐야 결혼할 남자인지 아는 건데? 어쨌든 그 당시엔 아무 생각 없이 엄마 말을 따랐다. 부끄럽지만 난 마마걸이었다)  어떤 방식이든지 내게 만남을 제시한 상대남을 네다섯 번 이상  만나 보지 않았다. 그런 내가 연애상담을 할 수 있었던 데는 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친한 친구가 상당히 낙관적인 성격이었다. 그냥 단순한 낙관적 성향이 아닌 사실 확장형 낙관적?

사실을 부풀여 가면서 좋게 해석하는 친구다. 그 친구 옆에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다 잘 될 것만 같아서  나도 그 친구와 같이 있는 것을 즐겼다. 그런 친구의 일상이 매번 흔들릴 때가 있었는데 그건 소개팅을 할 때였다.

소개팅 다음날이면 늘 비슷한 패턴의 대화가 오갔다.

" 글쎄 나하고 같은 음료수를 시키는 거야. 손을 떨면서 음료수를 마시던데? 그래서 첫 스텝부터 순조롭네... 했지. 그런데 이번에는 어느 동네 사냐고 묻더니 자기 집하고 가깝다고 좋아했어. 이거 날 자주 만나고 싶다는 뜻이겠지?"

"........................ 음 그런가?"

"그리고 일주일 중 무슨 요일이 제일 편한 날인지도 몰었어."

"응........... 그래."


친구의 추측 논리에 따라 상대 남성의 비언어적 요소 즉 눈빛, 목소리의 떨림에 의미를 부여하고,  단어 하나하나에 상대남의 심리를 갖다 붙여 봤지만 내겐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오히려 내 입술 안쪽에서는 "그건 아니지 않아?"란 말이 삐져나오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애써 나오려는 단어를 막느라 눈동자에 힘만 들어갔다.

실제로 그런 대화를 하고 이주일이 지나도 친구의 소개팅남한테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어둑해지는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마침내 친구가 높이 공중 부양했다가 떨어지는 걸 지켜보느니 차라리 친구가 공중부양을 시작하려고 할 때 바로 끄집어 내려놓아 그 충격을 완화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내 선에서 최면에 걸린 친구를 빨리 깨워주는 게 낫다고 착각하며 직언하기를 다짐했다.


그런 결심을 하던 차에 어느 날 친구는 또 소개팅을 했다. 아무리 봐도 상대방 남자는 친구한테 마음이 없는 것 같은데 (물론 친구를 마음에 들어하는 상대남도 많았다. 지금은 글의 흐름상 아닌 경우만 골라 대고 있다)

자꾸 상대방의 마음속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친구의 추측을 보며 안타까워 단언을 해버렸다.

"그날 며칠 뒤 우리 동네에 올 일이 있다 했는데 왜 연락이 안 오지? 혹시 무슨 일 생긴 거 아냐? 걱정할 만한?"

"좋았으면 연락이 왔겠지! 그냥 결론만 받아들여. 과정은 상대방의 몫이야.  연락 안 오면 안 좋아한 걸로 치면 간단해."

그렇게 말을 마구 휘두르다가 어쩌다 한 직언이 결과적으로 적중한 적이 있다. 그 조언이 효력을 발휘할 즈음부터는 좀 더 폭넓은 친구들이 내게 '내 남자의 마음을 읽어줘!'라며 카드를 펼쳐 보였다.

말하자면 난 검증된 '이론 편 연애 도사'였다. 


"그러니까 말이야. 어젯밤 12시에 전화 와서 잠깐 나오라는 거야. 보고 싶다고. 나한테 푹 빠진 거 아냐?"

"좋아하면 낮에 만나러 오겠지. 굳이 네가 밤에 잠자는 거 방해하겠어? 네가 잠을 못 자든 말든 상관없단 거 아냐. 너보다는 자신이 중요한 거지. 정말 좋아하면 새벽까지 잠 못 들어도 참고, 그다음 날 아침 일찍 찾아와야 하는 거지."

"나한테 결혼해서 일은 계속할 거냐는데? 나하고 결혼할 생각인가 봐?"

"결혼 생각이 있음 먼저 결혼하자고부터 하겠지. 일을 계속하는 사람이 그 사람의 배우자 요건중 하나 아냐? 그냥 1단계 체크리스크 만들고 1번 문제 푸는 건지도 몰라."


사람을 대할 때, 잠시 머리를 식히려는 주의다.

사람은 대하는 것이지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평소 내 지론이다. 나이 들수록 '필요'와 '친분'의 비례를 맞추며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염증을 느끼곤 한다. 

사회생활에서는 피할 수 없다고 쳐도 굳이 연애와 친구관계까지는 그런 이론이 적용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면에서 어장관리, 썸, 밀당. 인맥관리, 이런 단어 안에 포함되는 관계를 즐기지 않는다.  머리로 추측, 분석, 판단하는 것보다는  상대방이 한 말을 그 사람의 결론으로 담백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 중이다.

포커 치는 것을 영화로 보기만 했지만 상대방이 내놓은 카드만 읽으면 되지 굳이 손에 쥐고 가리고 있는 카드까지 읽으며 복잡해지고 싶지 않다는 주의다. 어찌 됐든 상대방의 결론은 내놓은 카드니까.


일상적으로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하는 말'이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다.  나한테서 나갈 때는 '솔직'이란 모습이었는데 상대방에게는 '무례'로 도착하는 경우가 다수니까.  그래서인지 우리는 상대방의 말 이면의 '의미'를 찾아 탐구활동을 하곤 한다. 그들이 한 말에 밑줄을 긋고 그 속내 맞추기에 여념이 없다. 학창 시절 국어시간에 훈련이 된 덕분인지 다들 화자의 말속 숨은 뜻 찾기에 달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간혹 서로의 말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은 의미 확대로 이어지고 이는 곧 잘못된 판단에 이르곤 한다.

.



그 후 몇십 년이 흘렀다. 일 년 전 이맘때, 친구 생일이라 같이 식사를 했다. 수십 년째 이어진 생일 만남이지만 생일 당일에 만난 건 아주 오랜만이어서 친구에게 물었다.

"생일 전 주에 만나지.. 오늘은 가족끼리 식사해야 하는 거 아냐?"

"응 우리 남편 오늘 회사 직원들하고 회식이야."

"?"

"응 글쎄 남편이 오늘 회식 날짜 잡아 놓고 나서 내 생일인 게 뒤늦게 생각났대. 그래서 다른 날로 바꾸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그런데 직원들 사정상 그냥 어쩔 수 없었나 봐."

"??"

"생일 날짜 피해 회식을 옮기려고 애쓴 걸 들어보니 정말 짠하고 고맙더라."

"????????????"

그 말을 하는 친구의 얼굴에, 수십 년 전 친구의 표정이 겹쳐졌다.  엄마의 손을 꼭 잡은 아이의 표정, 의심이란 단어를 배우기 전의 모습.  세월만큼 친구의 얼굴에 팔자주름은 얕게 생겼지만  표정은 그때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같은 상황을 두고 친구의 해석은 이랬다.

내 생일에 남편은 직원들과 회식을 하기로 했는데 취소하려고 노력하다 어쩔 수 없이 갔다.

그 상황을 바라보는 내 해석은 이랬다.

친구 생일에 친구 남편이 직원들과 회식을 하기로 했는데 취소하려고 노력하다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달랐다.


친구도 나도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그 태도 그대로였다. 단 하나 변한 건 친구의 해석을 대하는 나의 시선이었다. 전에는 그 친구의 잘못된 해석에서 '잘못'에 의미를 두었다면 지금은 친구의 잘못된 해석을 잘못으로 보지 않고 '품 넓은 시선'으로 본다.  결론만 취하는 것이 아닌 과정 속에서 상대방의 좋은 의도도 받아들이려는 모습. 수십 년 전 친구에게 연락하지 않은 상대남도 사실은 연락하고 싶었던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이 공존했을 것이다. 다만 연락 안 하는 쪽으로 결론이 지어졌을 뿐. 내가 상대방의 의도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결론만 파악하려던 것과 달리, 친구는 오차가 발생해 상처를 입더라도 그 사람의 표현을 다 받아들이곤 했던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친구는 가슴을 활짝 펴고 두 팔을 양쪽으로 최대한 벌린 만큼 담을 수 있는 행복의 양도 늘어난 모습이었다.  그런 포용력 있는 시선은 친구의 인간관계를 늘 '밝은 미소'로 이어주고  있었다. 매사 그런 식으로 좋게 상황을 바라보는 친구의 미소는 내가 본 중년 여성 중 제일 투명하고 맑아 보였다. 반면 만날 필터로 거르고 순도 체크하는 나는 (필터, 순도.. 내 글에 제일 많이 나온 단어일 거다. 금을 살 것도 아닌데... 순도는 무슨) 상대방을 엄격한 잣대로 재느라 늘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문득 한참 전에 본 영화 "왓 위민 원트'에서 닉 마샬(멜 깁슨)이 여자의 속마음을 목소리로 다 들을 수 있게 된 상황이 생각났다. 광고회사에서 일하는 닉 마샬은 여성의 마음을 잘 읽어야 여성상품을 광고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런 닉 마샬은 처음에는 여성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자신의 초능력을 감사하게 여겼다. 그러나 점차 상대방 여성의 마음을 알게 된다는 것에 피로감이 쌓이게 된다. 급기야는 그 초능력이 가져오는 여러 상황에 괴로워하게 된다. 영화에서는 마지막에 그 초능력을 다시 잃게 되면서 해피앤딩에 이른다.


사람의 속마음을 정확히 읽을 수 있다는 게 과연 행복한 일일까?

상대방의 진심을 완전히 안다는 건 후련한 일일까? 두려운 일일까?

과연 내가 수십 년 천 친구의 낙관적 확장 해석법을 차단했던 오만은 무죄일까?


'사실'은 외부에 있다. '생각'은 내 내부에 있다.

'사실'을 아름답게 가꿔서 '생각'으로 옮기는 능력은 거의 축복인 것 같다.

'사실'을 얼마나 오차 없이 받아들이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사실을 취해서 내 '생각'안에 자리 잡냐인 것 같다.

에픽테투스는 "인간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의견이다"라고 했다.


나는 과녁의 중앙지점만을 유의미하다고 보고 과녁의 가장자리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반면 친구는  과녁의 가장자리까지 포함해 과녁 안의 모든 지점을 유의미하다고 받아들이고 살았다.

이제부터 나도 조금은 오차범위를 넓히고 싶어 졌다. (물론 지금도 과녁 밖은 수용할 수 없다.: 선택적 소통)


며칠 전 빼빼로 데이였다. 올해도 변함없이 톡으로 빼빼로를 보내준 친구, 그 친구의 마음을 올해부터는 조금 더 품 넓게 확장 해석해 보려고 한다

" 이 친구, 날 무척 좋아하는구나? ㅎㅎ 고마워 친구"




                                                                    +) 같은 상황, 다른 해석은 시리즈로 이어집니다.

<식물에 비춰보는 인간관계 2>는 천천히 이어질 계획입니다.


                                                                                                    <사진 출처:픽사 베이>

이전 12화  변한 건 나인지도 몰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