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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Aug 20. 2021

용기와 용서, 그 사이에서

수채화로 그릴까 유화로 그릴까

학창 시절, 화실에 다닌 적이 있다. 혹시나 재능이 있으면 미대에 보내려던 엄마의 큰 그림에 따라서였다.

엄마 손에 이끌려 처음 화실 문을 열었을 때, 예상과 달리 엄숙한 분위기에 놀라 쉽게 들어서지 못했다. 그 안에는 스케치북 넘기는, 펄럭거리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나처럼 그림 한번 그려볼까?라는 생각으로 온 사람은 없는 듯했다.


다음 날부터 화실에 들어갈 때  삐그덕 거리는 문 소리가 크게 날까 봐 문고리를 문이  닫힐 때까지 잡고 있었다. 간혹 실수로 잡았던 문고리를 놓쳐 쾅 소리가 난 적도 있었는데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와는 달리 그 방안 아무도 문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조금 지나자 수채물감으로 정물화 그리는 시간을 기다리게 됐다. 물로 갠 뒤 바르는 수채화에서 나오는 맑은 느낌이 좋았다. 물과 물감의 비율에 따라 평면적인 도화지 안 사물이 입체적으로 살아나는 점이 흥미로웠다. 내가 만들어 낸 미묘한 색의 차이로 다른 느낌이 표현되는 것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던 것 같다. 어느덧 나도 쿵하는 문 소리에도 뒤돌아 보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림 속이 환히 비치는 수채화를 보고 있으면  맑고 투명한 느낌을 받곤 했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것이 마음과 행동의 일치를 보이는 사람 같았다. 

문제는 수채화를 그리다가 잘못 그렸을 때다. 잘못 그은 붓 자국이 생기면 그 자국을 지울 수 없었다. 마치 마음 안에 미움이 싹터 얼룩이 생기면 그 얼룩을 없애지 못하는 내 모습 같았다.  


내게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마음에 미움이 군데군데 피어나는 것과 비슷했다.  어렸을 때는 감정 안에 원망이나 미움이 없었다. 감정을 애써 구별한다 해도  더 좋거나 덜 좋거나 정도였다 (아, 아무 생각 없는 쪽도 많았다. 다만 無는 느낄 수 없으니까.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했던 것).

더와 덜을 구별 해 더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 듣고 더 좋아하는 친구와 같이 다니는 생활을 이어가곤 했다. 그 당시 내게 감정이란 것은 좋아함의 정도로 내 행동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요인이었을 뿐이었다.


하나, 둘 마음에 늘어나는 미움이란 티클은 수채화에 잘못 그린 부분처럼 거슬렸다. 마음에 담아두면 편안하게 자리잡지 못하고 내내 굴러다니며 날 찔러댔다. 이 낯선 감정을 처리하기엔 난 미숙했기 때문에 당혹스러웠다.  결국 그냥 그대로 드러내는 방법을 선택했다. 얼굴을 찌푸리거나 최대한 말을 줄이면서 내 감정을 그대로 나타냈다.  내키지 않는 자리에 나가선 "왜 이리 말이 없어?"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시무룩한 표정 탓에 '어디 아파?'소리를 듣기도 했다.


수채화가 그림을 잘못 그리지 않았을 때까지만 맑은 느낌이듯이 내 마음도 미움이 싹트기 전까지만 평안했다.

" 완벽하거나 포기하거나 "

맑은 느낌의 수채화처럼 내 인간관계의 결도 '잘못을 덮을 기회'는 허락하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미움이란 얼룩을 마주할 때마다 나 자신을 질책하는 소리가 들려도 나름의 합리화를 하곤 했다.


어차피 모든 사람과 다 잘 지낼 수는 없어.
내게 무례한 사람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pixabay  renemilone 님 사진


퇴직하고 나서 취미를 찾아 나설 때였다. 문화센터 카탈로그에 나와있는 여러 강좌 중 유화를 선택했다. 첫 수업 날, 유화반에 들어서기 전, 예전 기억이 되살아나서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빼꼼히 들여다본 화실 안은 예상외로 시끌벅적했다. 이젤 앞에서 서로 이야기를 하며 웃느라 내가 들어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쾅 소리가 날까 봐 쥐고 있던 문고리를 편하게 놓고 빈자리에 앉았다.


자유로운 분위기로 긴장이 풀어진 것도 잠시, 화실 가득 번지는 유화 물감 냄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평소에도 편두통에 시달려서 당장 그만두고 싶었지만 유화의 묘한 매력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잡아주었다. 유화는 그리다가 잘못 그려도 그 위에 다른 색으로 덧칠할 수 있었다. 그동안 누적적으로 쌓은 노력이 한 번의 잘못으로 사라지는 수채화와 달리 유화는 잘못 그은 획 위에 덧칠을 해서 재생할 수 있었다.  한번 더 기회를 주면서 잘못을 덮을 수 있다는 점은 그림 그리기라는 행위로도, 내 관계를 되돌아보는데도 의미가 깊었다.


유화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 베푸는 '용서' 같았다.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서툰 나는 유화를 그릴 때면 늘 마음이 가라앉았다. 내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삶의 자세를  몸소 실행하고 있는 유화를 대하면서 내 인격의 부족한 점을 지적받는 느낌이었을까? 그 두통이 유화물감 때문인지 내가 덮지 못하는 용서의 무게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결국 냄새를 핑계로 유화반을 그만두었다.




그 후로 수년이 흘렀다. 다시 그림을 배워볼까 하고 집 근처 센터를 검색하고 있다. 아마 코로나가 좀 가라앉으면 배우게 될 것이다(그런 날이 오기는 올까?) 수채화와 유화 두 반 중 하나를 선택하려고 강사 이력과 강의 계획표를 검색하다 멈추고 화폭 안 그림을 보듯 내 마음의 그림을 들춰 본다.


지금까지 나는 내 마음의 그림을 수채화로만 그려왔던 것 같다. 미움이 피어나기 전까지만 맑다가 상대방에 대한 미움이 그림에 튀고 나면 그 티클을 처리하는데 미숙했다. 때로는 티끌만 바라보고 속을 끓이면서 시간을 흘러 보내곤 했다. 수채화 속 망친 부분을  보고, 또 보고, 다시 보면서도 그 장을 넘길 용기도, 상대방의 잘못을 덮어 줄 용서도 부족했다. 티클에 지배당한 삶의 구간이 생각보다 길었다. 안타까운 시간이다.

때로는 '사람은 변하지 않아'하며 쉽게 포기하고 그 장을 넘겨버린 적도 있다. 되돌아보면 아쉬운 인연이다.


다음장으로 넘길 정도의 '큰' 잘못아니라면, 유화로 그려보는 건 어땠을까? 

물론 타인의 모든 잘못을 덮어줘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용서허용으로 알고 반복적으로 잘못하는 사람도 있고, 말로는 사과하지만 사실은 잘못을 개선할 의지조차 없는 사람도 있다 (아니 애초에 잘못을 인식조차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 경우는 수채화를 그리다 망쳤을 때처럼 그 장을 넘겨 버리는 용기도 필요하다.

용서를 허용으로 아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용서가 아니라 용기다. 관계를 놔 버리고 다음장으로 넘기는 용기.


다만, 이번 장을 간직하기로 결정했다면 유화로 덮는 훈련도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내 마음 그림 속 '작은' 티끌을 덮는 것,  티끌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작업은 필요하다.  물론 유화 덧칠할 때처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게다가 유화의 거친 질감처럼 원래 상태로 완벽하게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 덧칠은 내게 마음의 자유를 줄 것이다.


살아가면서 내 마음에 생긴 미움을 그 구성요소에 맞게 잘 다루는 '마음 수련',  정기적으로 대청소하듯이 필요한 작업인 듯하다. 

수채화를 그리다가 망쳤을 때처럼 다음장으로 과감하게 넘겨야 할 때도 있고,

유화를 그리다가 잘못 그렸을 때처럼 그 부분을 덮어주어야 할 때도 있다.

유화로 덮어주는 작업, 그게  우리에게는 글쓰기가 아닌가 싶다. 글을 쓰면서 상처를 다른 색으로 덧입히는 것, 상처 부위의 날 섰던 색이 한 층 가라앉아 발색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내 마음 그림에 티끌이 생길 때마다 한번 더 바라보려고 한다. 

이 티끌을 유화로 덮을 것인지, 수채화로 넘길 것인지. 

나이 들수록 그 둘을 분별할 혜안을 기르고 싶다.



                                                                                         <픽사 베이   Lee_seonghak 님 사진>





브런치 작가님 중에 수채화를 잘 그리시는 작가님 브런치를 같이 올려 봅니다.


https://brunch.co.kr/@campo#info


브런치 작가님 중에 유화를 잘 그리시는 작가님 브런치를 같이 올려 봅니다.


https://brunch.co.kr/@dew1217#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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