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육천 보를 걷고 있다. 원래 목표는 만보였는데 산책 첫날 걷다가 지쳐서 육천 보로 낮춰버렸다. 실행 가능한 목표를 설정하는 걸 좋아한다. 만보 목표로 걷다가 포기하느니 육천 보라도 꾸준히 걸으려고 한다.
정오 즈음 나가 걷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내 근처를 얼쩡거리는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작달막한 그림자가 계속 나인 척 내가 아닌 듯한 모습으로 나를 쫓아 붙었다. 어렸을 때 모습인 양 나를 쫓아오는 그림자가 정겨우면서도 낯설었다.
'내가 이렇게 작았을 때도 있었겠지. 정오 그림자는 내 모습과는 달라.'
잘못 그린 모습으로 날 따라오는 그림자가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낮 12시 내 그림자
그다음 날, 피곤이 번져가는 어스름한 늦은 오후, 지친 몸을 끌고 나가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었다.
나보다 훨씬 크고 긴 그림자가 서있는 걸 보게 됐다.
'헉 내가 저렇게 커? 키다리인가? 왜곡현상인데?'
우스꽝스럽게 늘여놓은 그림자 모습에 웃음이 났다. 나와 그림자의 차이만큼 그림자가 틀렸다고 확신했다.
늦은 오후 내 그림자
그림자를 보면 내 모습과 비교하게 된다. 나를 기준으로 놓고 나와 다른 점을 찾는다.
'왜 나보다 짧지?' 또는 '왜 이리 죽 늘여놨지?' 하면서 말이다.
타인이 나를 바라보며 평가하는 시선에 수긍이 안 갈 때가 있다.
'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날 깎아내리며 비난하지?' 하는 때 말이다.
심할 때는 '저 사람 혹시 나한테 무슨 악감정이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분명 나는 내 키만큼인데 상대방은 나를 내 키 반만큼만 인정하고 깎아내렸다. 묘하게 왜곡하기도 했다. 꼭 한낮의 그림자처럼 말이다.
그뿐인가? 그들이 나를 향해 내뿜는 인정과 기대는 늘 어긋났다. 내가 한 일에 대해서는 잘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앞으로도 계속 내가 충실하기를 기대했다. 인정은 한 낮 그림자처럼 짤막하게, 기대는 늦은 오후 그림자처럼 잔뜩 부풀이곤 했다. 제대로 된 인정을 안 할 거면 기대도 접던지. 인정은 안 하면서 기대는 늘 넘치게 하곤 했다. 모순적이었다. 비난과 기대, 비난과 기대를 이어가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에 유해가스가 빼곡하게 부풀어 올랐다.
나하고 다른 모습으로 나를 그려대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속에서 손놀림이 분주해지곤 했다. 뚜껑이 맞지 않는 락앤락 밀폐용기를 억지로 맞추듯이, 귀퉁이를 맞추고 꽉 눌러보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이 그린 내 그림자와 실제의 나, 그 오차를 증명해야 할 것 같았다. 내 모습과 그림자의 차이를 일일이 설명하기도 했다. 그렇게 부질없는 증명서를 만드는 데 참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그럼에도 잘못 그린 그림자를 수정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그림자는 나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쫓아다녔다.
그림자처럼 나를 멋대로 그리는 이상한 사람은 어디에나 나타나곤 했다. 이제는 그런 사람과 매번 맞닥뜨려 갈등하는 나 자신이 피곤해졌다.
'내가 보기엔 저 사람은 분명 이상해. 그런데 저 사람 주위에 있는 친구는? 다 잘 지내잖아. 그럼 저 친구까지 이상한 거야? ' 그 이상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도 삐걱거린다면 내 생각에 확신이 들 텐 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 사람은 나름 친분을 이루는 인간관계 안에서 정을 쌓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저 사람을 잘못 본 걸까?'
차츰 내 생각이 의심스러워졌다. 때로는 그림자에 맞춰 나를 역 판단하는 경우도 있었다.
늦은 오후 그림자를 보며 '실제 내 모습이 저렇게 길쭉한 거 아니야?' 생각하기도 하고
한낮 그림자를 보며 '사실은 나 이 정도인가?'라고 혼동스럽기도 했다. 그림자에 집착할수록 나에 대한 확신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걸으면서 그림자에 신경이 쏠렸다. 그러다가 문득 시선을 그림자에서 하늘로 돌려봤다. 눈이 부셔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찡그려졌다. 오른손을 올려 손등으로 그늘을 만들었다. 드디어 해 위치를 잡아냈다.
'음 해가 저만치 있고 내가 여기 있을 때 그림자는 나를 이렇게 작고 아담하게 그리는구나'
되돌아보면 나는 오랫동안 나와 그림자 크기가 다른 것에 지나치게 신경을 써왔다. 기억 속 그림자와 실랑이하는 내 모습은 우스꽝스러웠다. 나와 그림자가 얼마나 다른지에 그리 몰입할 가치가 있었을까. 차라리 그 시간에 자세를 바르게 하는데 더 신경 썼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그랬다면 지금 정형외과도 안 다니겠지).
그림자는 해의 위치와 각도에 따라 변할 뿐이다. 지구가 도는 한, 매번 나와 같은 그림자를 보는 건 불가능한 게 사실이다. 나와 다른 그림자에 쓸데없이 민감해져서 나와 똑같은 그림자를 얻으려고 애쓴 시간은 무의미했다.
그림자가 나와 다르면 뭐 어떤가?
내 모습은 내가 잘 알고 있으면 된다.
나 자신의 의미와 가치는 내가 제대로 알고 지켜나가면 됐다. 굳이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내 그림자가 내 모습 그대로 인지에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없었다.
나를 대하는 방식, 나를 이해하려는 노력, 나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그 상대방이 나의 어느 방향에 서있냐, 나와 얼마만큼 거리가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 해가 어디쯤 떠 있느냐에 따라 내 그림자의 크기가 변하고 해가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냐에 따라 내 그림자 방향도 변하듯이 말이다.
따뜻하고 사랑이 깊은 사람이지만 회사에서 상사로 만났을 때는 엄격한 검열 기계 같을 때가 있다. 헌신적이고 이해심 많은 가족이지만 시월드의 위치에 섰을 때는 차갑디 차가운 인척일 수 있다. 친구로 만났으면 좋은 인연이었을 텐데 학부모 관계로 만나 어긋나는 경우도 꽤 있다. 관계의 삐걱거림은 사람 그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의 역할과 관계의 위치가 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애초에 '특정' 사람을 대하는 시선의 각도가 굴절된 경우도 있다. 안타깝지만 이 경우 또한 내 그림자를 많이 왜곡한다.
이제는 나보다 쪼그마한 내 그림자를 볼 때도, 나를 훌쩍 뛰어넘는 큰 그림자를 볼 때도 나와 그림자의 차이를 밝혀내려 애쓰지 않는다. 그 그림자도 나에서 출발한 하나라고 여기며 받아들인다. 나를 짤막하게 그려내는 그림자를 보면 해의 위치를 떠올린다. '정오의 해 위치에 있어서 그런가 보다' 한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손을 올려 눈 위에 차양을 만들고 해가 어디쯤 있는지 바라본다.
아 해가 저기 있구나
그저 한참을 바라본다. 잠시 숨을 고르고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대문 사진은 저 아닙니다 ^^
< Pixabay Victoria_Borodinova님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