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선재길에서 4화 < 나는 싸우지 않는다 >
선재길은 시작부터 끝까지 물과 함께 한다. 길을 따라 물이 흐른 것인지, 물을 따라 길이 난 것인지 굳이 다투지도 않는다. 물은 작은 노래로 길의 외로움을 달래고, 길은 물소리에 취하며 묵묵히 그 곁을 지킨다. 지루하다 싶으면 잠시 각자가 되었다가도 어느새 서로를 향해 내달려 하나로 부둥켜안는다. 어디가 물이고 어디가 길인가? 물과 길이 만나 '물길'이 되고, 그 물길을 따라 하늘과 구름과 사람과 세월이 어울려 흐른다. 선재길이 흐른다.
1981년 성철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를 남기셨다. 이에 대한 다양한 풀이들을 종합하면
'세상 만물 모든 것에서 부처님의 뜻을 볼 수 있음에도, 부처가 어디 계시냐며 법당 안에서만 부처님을 찾는 불자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신 것'이라고 한단다.
세상 만물에 부처의 뜻이 담겼다는 말씀을 떠올리니 물과 길이 다르게 보였다. 그 물은 그냥 물이 아닌 자연의 '도(道)'였고, 그 길은 그냥 길이 아닌 사람의 '도(道)'였다.
노자는 도덕경 상편 8장에서 물을 선(善: 좋은 것)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상선(上善)이라 하며, 물이 지니고 있는 큰 덕(德)을 칭송하였다.
첫째,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한다(利萬物). 물 없이 살 수 있는 생명체는 없다. 지구 생명의 기원인 물은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고 원천이다. 동물도 식물도 물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다. 이처럼 물은 무든 것을 이롭게 한다.
둘째, 물은 만물과 싸우지 않기에 허물이 없다.(夫有不爭 故無尤). 부딪히면 돌아가고, 때리면 흩어졌다 다시 만난다.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글게, 각진 그릇을 만나면 각진 모습이 된다. 세상의 허물과 잘못은 남과의 다툼 때문에 생긴다. 물은 남과 다투지 않으니 어리석지 않고 허물이 없다.
셋째, 물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도 마다하지 않는다. 물은 높은 곳에 머물기를 고집하지 않으며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른다. 깨끗함만 고집하지 않으며 시궁창이라도 꺼리지 않는다. 물은 자연의 도를 닮았다.
넷째, 물은 부족함과 넘침을 알기에 머무를 때와 떠날 때를 안다. 물막이 보가 설치된 냇가를 보았다면 이 말뜻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물은 부족하면 흐르지 않고 한 자리에 머문다. 비로소 자신의 넘침을 알게 되면 물은 흐르기 시작한다. 떠날 때를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떠난 물은 새로운 길을 만들고 드넓은 바다에 닿는다.
선재길을 걸으며 노자를 생각했다. 짧은 한자 실력 탓에 한자와 풀이를 번갈아 훑으며 사력을 다해 읽었던 '노자 도덕경(정세근, 문예출판사)'을 떠올리며 물과 함께 길을 걸었다. 사람들은 맑은 물을 만나면 아름다움과 맑고 깨끗함을 떠올린다. 나 역시 지금껏 물을 만나면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며 살았다. 가끔은 '낚시를 하고 싶다', '수영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곁들이면서.
그러나 도덕경 한 구절을 떠올리니 어느새 노자가 내 곁에 섰다. 노자와 대화를 나누며 물에서 자연의 도를 찾았다. 그리고 사람의 도를 생각했다. 겨울 오대천 맑은 물을 보면서 나는 낚시도 잊고 수영도 잊었다.
늘 아래를 향하는 물처럼 겸손하고 욕심 없는 삶이면 좋겠다. 유한한 인생에 끝없이 위를 향하는 사람살이의 치열함을 물에서는 찾기 어렵다. 가파르게 아래를 향하는 곳에서도 물은 생명을 품는다. 생명의 여울이 그곳이다.
저마다 높은 곳을 향해 줄달음치는 대나무 그늘은 그 아래 생명을 품지 않는다. 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잉태를 방해한다. 모든 양분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제 몸집과 키를 키우느라 주위를 둘러볼 여력도 없고 여유도 없다. 오로지 하늘로 향할 뿐. 그렇다면 우리네 사람살이의 모습은 또 어떤가?
쥐꼬리만 한 명예와 부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며 내일만을 바라보란다. 잠시 주위를 볼라치면 달리는 말에 채찍이라며 정면만을 응시하란다. 주위를 살피지 않으니 주변 사람도 나를 살피지 않는다. 그저 함께 머물고 있을 뿐, 가족도 친구도 그저 주변인이 된다. 하늘로만 향하는 나무는 강제로 꺾여야만 아래를 향한다. 하지만 그건 아래를 향하는 게 아니다. 추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나무와 다르다. 마음을 고쳐먹으면 허리를 굽혀 주변을 응시할 수 있다. 스스로 구부린 허리는 유연함의 상징이지만 강제로 꺾인 허리는 심각한 신체 부상이다. 나는 물처럼 유연하게 살고 싶다. 아래로 향하면서도 주변 사람을 이롭게 하는 삶이라면 참 좋겠다.
부족함과 넘침을 예민하게 깨닫고, 기다릴 때와 떠날 때를 아는 인생이면 좋겠다. 자신의 부족함을 모르면 오만하게 되고 실패의 원인이 된다. 반대로 넘침을 모르는 삶은 우유부단하여 기회를 상실하고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다. 자신의 상태를 예민하게 파악할 수 있는 성찰의 힘이 내게 있으면 좋겠다.
기다릴 줄 아는 인생이면 좋겠다. 내 아이의 성장을 기다려 주는 아버지, 내 학생들의 깨달음을 기다려 주는 선생이면 좋겠다. 잘못을 다그치기보다는 에둘러 깨닫게 해주는 어른, 대화를 다그치기보다는 온화한 미소로 상대의 말을 기다리는 직장 동료가 되었으면 좋겠다.
싸우지 않아 허물없는, 흐르는 강물 같은 삶이었으면 좋겠다.
사소한 것에도 화를 내고 작은 일에도 다툼이 벌어지는 위기의 시대이다. 나만 중요하고 남은 아무것도 아닌 위험한 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감염병을 피해 타국에서 귀국한 내 나라 사람도 배척하는 야만의 시대이다.
일상이 투쟁이 된 시대, 역지사지가 사라진 시대에 싸우지 않는 물의 지혜를 배우고 싶다.
물이 싸우지 않는다고 불의를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물은 싸우지 않지만 맞섬을 피하지 않는다. 바위가 앞길을 막으면 끝끝내 바위에 구멍을 내고, 산이 가로막으면 휘돌아 감싼다. 그렇게 물은 제 길을 간다. 인고의 노력과 돌아가는 지혜로 물은 언제나 승리한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는 이치다.
아주 작은 손해조차 허용하지 않는 사회다. 남의 잘못은 아주 작은 허물도 샅샅이 찾아 대대적으로 항의하고 따진다. 반대로 자신과 그 주변의 허물에 대하여는 한없이 너그럽다. 사람이니까 절대 실수를 용서하면 안 된다고 악을 쓰다가도, 사람이니까 실수하는 거라며 인간의 한계라고 열변을 토한다. 학교폭력 대책회의가 잦은 학교 현장에서 늘 보게 되는 장면들이다. 이 나라의 미래가 심히 걱정스럽다.
물처럼 살기 위해서는 삶의 지혜와 용기,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첫째, 나의 잘못이라면 인정하고 사과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물은 눈 앞에 바위가 막아섰다고 바위와 무조건 맞서지 않는다. 자신의 한계를 알면 바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포기한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 바위에 길을 낸다. 내 잘못임을 알면서 끝까지 맞서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자.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지금 당장의 이익처럼 보이는 게 끝내는 자기 발등을 찍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둘째,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손해나 피해라면 용서하는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그 어느 때보다 관용과 배려가 필요한 오늘날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장으로 우리 사회가 변하길 바라지 않는다면 용서의 미덕을 실천하자. 물론 상대의 사과를 전제로 말이다. 언제나 사과가 먼저이다. 막무가내식, 우기기 식은 곤란하다. 내 자녀가 살아갈 사회가 사람 사회가 아닌 동물의 왕국이 되길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셋째, 잘잘못을 가리고 진실을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도, 상대를 너그러이 용서할 수 있는 너그러움도 잘잘못을 가리는 지혜로부터 나온다. 나의 잘못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면 상대방 탓을 하게 될 테고, 상대의 잘못을 보지 못하면 시시비비가 가려지지 않게 된다.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까닭이다.
겨울 선재길을 걸으며 자연의 길과 인간의 길을 생각해 본다.
길은 길이요, 물은 물이다. 다만, 길이 물이 되고 물이 길이 되는 깨달음을 얻었던 선각자들의 깊은 성찰이 한없이 부러워진다. - By 철물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