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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물점 Mar 16. 2020

코로나19, 위기 사회와 언론

사회적 위기를 대하는 언론의 행태 '열린사회와 그의 적들'

열린사회와 닫힌사회

칼 포퍼(Karl Popper 1902~1994)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자이자 사회과학자로 현대 과학철학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열린사회와 그의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뉴질랜드에서 망명 생활을 했던 그의 인생 역정을 대변하는 저서로, 그는 이 책을 통해 나치즘으로 대표되는 닫힌 사회의 원인과 폐해를 분석하고 비판함으로써 열린사회로 대변되는 현대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포퍼가 제시한 열린사회란, 단순히 전통적 권위에 의지하거나 조직의 일원이 됨으로써 힘을 획득한 사람들의 독단적 권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거부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사회이다. 따라서 열린사회 구성원들은 제시된 정책을 비판에 회부하고, 만일 그 정책들이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없어 보이면 필요에 따라 그 정책들을 폐기하도록 할 수 있다. 이때 각각의 구성원들에게는 합리주의적인 태도가 요구되는데, 포퍼에게 있어서 진정한 합리주의자는 다음과 같은 태도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 수도 있다. 진리에 가까이 가는 것이 누가 옳은지 그른지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이 논의가 끝날 때쯤 우리 모두 이 문제를 전보다 더 명확하게 볼 수 있기를 바라자. 이러한 목표를 염두에 둘 때만 우리는 토론에서 자신의 견해를 최대한 옹호할 수 있다.' 


'합리주의자는 한 마디로,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는 것보다 다른이에게서 배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나아가 남의 의견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에 대한 남의 비판을 쾌히 받아들이고 남의 생각을 신중히 비판함으로써 타인에게서 기꺼이 배울 의향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판, 더 정확히 말하면 '비판적 논의'이다.'  [위키백과]


닫힌사회에 대한 포퍼의 비판

닫힌사회에 대한 포퍼의 비판은 플라톤과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비판으로 구체화 되었다. 포퍼는 이들 철학 사상이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 형성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고 굳게 믿었다.


플라톤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그가 '국가론'에서 제시한 '철인이 통치하는 이상국가론'에 있다. 플라톤은 국가를 구성하는 구성원을 지배자와 수호자 그리고 생산자 계급으로 나누고,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국가를 '정의로운 국가' 즉, 이상 국가로 제시하였다. 특히 지혜의 덕을 지닌 소수의 철학자가 통치할 때 진정한 이상 국가가 실현된다는 그의 생각은 '소수의 엘리트 집단에 의한 통치'라는 전체주의 사상에 철학적 배경이 되었고 태생적인 인간의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보았으며, 특정 민족이나 지배 계층의 생물학적인 우열을 교묘하게 활용한 히틀러의 나치즘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칼 포퍼의 시각이다.


헤겔과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역사 결정주의와 관련이 있다. 포퍼는 공산주의와 파시즘에 깔려 있는 공통적인 신념으로 '역사주의'를 꼽았다. 역사주의란 역사의 발전 과정은 하나의 법칙성을 띠며 예측 가능하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이러한 결정주의적 역사관은 공산주의자와 파시즘 지도자들에게 차용되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역사의 주인이며 자신들의 행위는 역사 발전의 필연적 과정이라고 포장함으로써 자신들의 폭력을 미화하였다. 포퍼는 이들이 주장하는 역사적 법칙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헤겔과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처럼 역사의 진행을 예측하거나 포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열린사회와 언론

현대 민주주의(열린사회) 발전 과정에서 언론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포퍼가 제시한 '비판적 논의'를 위해서도 언론의 개입은 필수적이었다. 개별화된 구성원들의 흩어진 의견은 사회정책에 대한 논의 참여에 효율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모아 대변해 줄 대리인이 필요했으며 언론이라는 새로운 사회 기관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이것은 마치 절대 왕권에 맞서기 위해 국민의 대표 기관인 '의회'를 만든 것과 같은 이치이다.


언론은 그렇게 민의의 대변인으로 현대 민주주의가 초석을 쌓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사회 구성원들은 정책을 결정하는 논의에 참여하기 위해 언론을 활용했고, 언론은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그 구성원들의 의견을 충실히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민주주의와 언론은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닫힌사회에서 열린사회로 우리를 이끈 거대한 사회적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한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 수준을 가늠할 때 언론 자유 지표를 활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간주되었다.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는 그렇게 화학적으로 결합하게 된 것이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최소한 한 가지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언론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태어났고 민주주의와 함께 발전한 것이지, 민주주의가 언론의 자유를 위해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코로나19, 사회 위기에 드러나는 일부 언론의 민낯

누구나 위기의 순간을 맞게 되면 본능에 의지하게 된다. 살고자 하는 생명에의 욕구가 감춰두었던 개개인의 민낯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회나 국가도 개인과 다르지 않다. 역사적으로 위기에 직면한 사회에서 전체주의와 같은 독재적 정부 형태가 태동한 것도 같은 이치이다.


위기의 정도가 심화될수록 사람들의 공포는 극에 달하고, 극에 달한 구성원의 공포를 이용하여 다양한 형태의 파시즘이 맹위를 떨쳤다. 멀게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벌어졌던 펠레폰네소스 전쟁 후 아테네에서 그랬고, 가깝게는 1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서 그랬다. 아테네에서는 민주정이 붕괴되고 다양한 형태의 독재자가 등장하였으며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나치즘'이 태동했다.


2020년, 코로나19라는 전염병 공포를 마주한 우리 한국사회에도 광기의 민낯이 곳곳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가장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가짜 뉴스',  '가짜 언론'을 꼽고 싶다.

가짜 뉴스의 문제를 지적하는 뉴스 화면 <연합뉴스 캡쳐>

문제 해결보다 불안을 증폭하는 가짜 언론사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는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다. 언론사도 마찬가지다. 어느 나라나 진보 언론과 보수 언론이 존재한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의 균형을 지켜주며 상식이 향하는 곳으로 사회 여론을 형성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의 언론들은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 언론은 이미 언론으로서의 생을 다했다. 이들은 자신의 날개로 사회적 균형을 만들기는 커녕 스스로 날개를 부러뜨려 우리 사회의 추락을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것 같다.


좋은 말로 표현하면 반대를 위한 반대이다. 그러나 최근의 사회적 불안을 틈타 그들이 휘둘러대는 펜의 끝은 그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북한'보다 더 우리 사회의 폭망을 염원하는 것 같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일까?

'방역 실패', '중국' 탓하기, '마스크 대란 증폭하기'...... 이루 다 열거하기 힘든 그들의 논조대로라면 이미 우리 대한민국은 10번은 끝장났어야 한다. 그렇게도 나라 망하기를 희망하는 절절함은 보도 듣고 못했다.


'월급 160에 마스크 사는데 20만원 썼다'는 최근 국민일보의 보도는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이다. 마스크 5부제가 실시 중인데 누가 도대체 20만원을 마스크 사는 데 썼단 말인가? 그리고 그 경우가 다수 국민이 공감하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인가? 그나마 기독교계 신문이라면 지금 벌어지는 소규모 지역 감염의 장본인으로 떠오른 휴일 예배에 대하여 자성의 목소리를 보태야 하는 게 도리 아닌가?


누구나 이제는 알게 되었겠지만, 이미 우리나라의 보수 언론은 언론이 아니다. 언론의 기본 역할인 민의를 대변하는 게 아니다. 이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특정 정치 집단의 이익을 대변한다.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마구잡이로 상대를 헐뜯는다. 언론이 아닌, 정치 깡패가 되었다. 특정 정치 집단의 충실한 사냥개일 뿐, 사회 구성원의 안전과 발전에는 관심도 없다. 그들이 토해내는 것은 여론이 아니다. 특정 정치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우리 사회가 폭망해야 한다는 유아기적 복수심에 눈이 먼 '정당 기관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일상화 된 가짜 뉴스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가짜인가?

위기 사회에는 온갖 설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대중의 불안감을 먹잇감 삼아 그럴듯한 스토리로 무장하여 사람들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물론 우리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중세의 마녀 사냥이 그랬고, 오늘날의 댓글 사냥 또한 본질적으로 이와 다르지 않다.  


대중이 진실에 목말라할수록 가짜 뉴스, 가짜 음료는 그 판을 키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임계점에 도달한 가짜 뉴스는 진실을 밀어 낸다. 진실은 자취를 감추고 누구도 진실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게 진실이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퍼진 게 사실이 된다. 모두가 속고 또 모두가 속인다.


가짜 뉴스의 이면에는 돈이 있다. 단순히 정치적 이해관계의 목적 달성을 위해 자신의 열정을 바쳐 뉴스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디지털 시대, 유튜브가 가져 온 대표적인 해악은 모든 저작물에 돈의 고리를 붙인 것이다. 두 패로 나뉘어진 사람들을 돈의 그물에 가두기 위해 그들은 입맛에 맞는 가짜 뉴스들을 만들어 낸다. 말 그대로 크리에니터이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많이 퍼뜨리고, 많이 보게 하면 그만이다. 뉴스로 시작해서 소설로 끝나도 누구하나 탓하지 않는다. 재미있으면 그만이니까. 구독수만 많으면 돈이 되니까.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액턴 경(Lord Acton)으로 불리는 영국의 정치가 존 달버그 액턴의 말이다. 칼 포퍼가 닫힌사회를 비판하며 열린사회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은 '반증 가능성'이다. 즉, 절대 진리는 없으며 진리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도 항상 반증 가능성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도 만찬가지다. 다양한 의견에 열려 있어야 하고, 모든 권력은 검증 받아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견재 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달했다는 오늘날에도 합의되지 않은 '절대 권력'이 있는 것 같다. 이 절대갑은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누구든 비판한다. 반면, 자기 자신은 누구로부터도 비판받지 않는다. 아니, 비판을 받지만 인정하지 않는다. 남은 자유롭게 비판하면서, 누군가 자신을 비판하려 하면 '반민주주의자'라는 족쇄를 덧씌운다. 절대 권력도 이런 절대 권력이 없다. 모두가 눈치를 보는 디지털 시대 절대갑, '언론'이다. 민주주의가 키워낸 괴물이다.


 언론 자유는 언론인과 언론 기관을 위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다.

언론 자유를 목이 터져라 주창하는 언론인들이 소위 사설이나 칼럼에서 자주 인용하는 문구가 있다.

“나는 당신의 말에 찬성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 내 목숨을 걸겠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가 한 말이다. 표현의 권리를 이렇게도 극적으로 묘사한 명언이 어디 또 있겠는가? 그러니 언론인들이 이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이 꼭 언론인에게만 해당하는 말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표현의 권리는 모든 사람의 권리이다. 그러니 이 말을 언론인들이 자기 기관과 자기의 의견을 보호하는 방패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이 말은 오늘날 사회와 맞지 않는다. 볼테르가 살았던 시대는 절대왕정의 시대이다. 왕의 명령을 하늘의 명령으로 여기던 시절이었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극단적으로 억압되었던 시대였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언론 자유 지수는 선진국 중에서도 높은 편에 속한다. 지금 어느 누가 언론의 보도 권한을 막고 서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언론의 권력이 비대해져 통제가 어려운 게 오늘날의 현실 아닌가?

내가 교사라고 해서 '군사부일체'를 주장하면서 나를 임금과 같이 여기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를 교직에서 끌어내리고자 댓글 공격을 감행할지 모른다. 과거의 명언이라고 해서 모두 오늘날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열린사회의 새로운 적 '비판 받지 않는 언론', '가짜 뉴스'

오늘날 언론은 통재 받지 않는 절대 권력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이익을 대변함은 물론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을 향하는 견재의 눈초리를 조롱한다. 그 거대한 장벽 앞에 누가 감히 맞서 싸울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이익을 대중의 이익으로 포장하고, 정파적 입장에 여론이라는 가면을 씌워 무자비하게 살포하는 그 썩은 말과 글들의 토사물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열린사회의 비판적 논의를 가로막는다. 열린사회의 새로운 적이다.

 

오늘, 칼 포퍼가 다시 살아온다면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여러분, 나는 여러분 모두가 언론 비평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냉철한 사고로 언론을 대한다면 지금과 같은 언론의 절대 권력은 허물어질 것입니다. 저들은 자신의 혓바닥으로 여러분들의 생각을 요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언론을 향한 극도의 경계심을 푸는 그 순간, 우리는 한낱 디지털 시대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세요. 언론은 펜의 힘을 자기 방어를 위해 사용해선 안 됩니다. 정치 세력에 오염된 비판받지 않는 언론과 가짜 뉴스를 향해 우리는 끊임없는 반증 가능성을 요구해야 합니다. 그렇게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새로운 열린 사회의 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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