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분업화 사회에서 부모의 육아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2019년 5월 어느 날
서울에서 초등학교 보건교사로 근무하는 김 선생님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바쁜 걸음을 옮겨 교문에 들어섰다. 김 선생님의 출근 시간은 언제나 남들보다 이른 편이다. 그녀가 근무하는 학교의 공식적인 출근 시간은 오전 8시 40분. 그러나 그녀에게 오전 8시를 넘기는 출근은 가뭄에 콩 나듯 무척이나 드문 일이다. 아니, 다시는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단정하는 편이 더 정확할 수 있겠다.
남들에게는 상쾌한 아침 공기에 취했다거나 콩나물 지하철을 피하려 한다고 둘러댔지만, 그녀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아픈 기억이 마음 한구석에 오롯이 숨겨져 있다. 이런저런 일로 출근 시간이 8시를 넘길 때마다 기억의 저편에서 득달같이 달려와 날카롭게 가슴을 후비는 아픈 기억. 그로 인해 오전 8시는 그녀가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있는 출근 한계선이 되었다. 혼자의 노력으로는 감히 넘어설 수 없는 불안의 마지노선이 되었다.
자녀가 성장하여 성인이 되면 부모들은 육아로부터 잃어버린 시간을 조금씩 되찾게 되는데, 나 또한 딱 그만한 연령대에 속해 있다. 아침 시간이 자유로운 나는 새벽 출근을 즐긴다. 즐긴다기보다는 일찍 출근해서 하루 일과를 준비하는 일에 익숙해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성장한 자녀를 두고 일찍 잠에서 깨는 내 또래의 직장인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일찍 출근하는 일 아닐까? 그나마 젊은이들 틈에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출근하려는 자기 편의 때문이라고 해도 굳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어쨌든 그럭저럭 7시 30분이면 학교에 출근하는 나는, 학교라는 조직의 특성상 출근 순위로 따지면 언제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편이다.
여느 날처럼 빈 교실에 앉아 하루 일과를 준비하던 어느 날,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가 교실의 정적을 깼다. 그리고 느긋하게 집어 든 수화기 너머로 김 선생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좀 도와주세요. 글쎄, 비둘기가 보건실 복도에 들어와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어요."
여느 직장들처럼 학교도 메신저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까닭에, 교실 컴퓨터를 켜는 순간 누구누구가 출근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사정을 생각하면 김 선생님이 다급하게 나를 찾은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김 선생님은 먼지와 깃털을 날리며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는 불쌍한 비둘기를 밖으로 내보내 줄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보건실 앞 복도에 이르자 푸드덕 거리는 비둘기의 날갯짓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나의 등장이 비둘기를 더욱 당황스럽게 했는지, 유리창에 제 머리를 연이어 부딪치며 쿵 쿵 세상 밖으로 처절한 절규를 보내고 있었다.
김 선생님은 비둘기가 창에 제 머리를 박을 때마다 비둘기보다 더 큰 비명으로 사람인 나조차 놀라게 했다.
"선생님, 진정하시고 보건실에 들어가 계세요. 제가 창문을 모두 열고 비둘기를 내보낼 게요."
긴 복도의 창문 위아래층을 모두 활짝 열었다. 내가 창문을 여는 사이에도 불안한 비둘기는 허둥대며 연신 유리벽에 자신의 입술 자국을 남겼다. '쿵' 소리와 함께.
그러나 비둘기가 제 길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비둘기의 자유를 향한 몸짓은 대략 20%의 우연적 확률로 마침내 성공했다. 비둘기도 다행이었겠지만 나와 김 선생님에게도 참 다행한 일이었다.
무척 짧았던 시간임에도 비둘기가 남긴 흔적은 엄청났다. 깃털과 먼지와 배설물로 뒤엉킨 보건실 앞 복도는 오랫동안 방치된 폐교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나와 김 선생님은 복도에 남겨진 비둘기의 흔적을 차례대로 지워나갔다. 생각보다 많은 비둘기 배설물을 보며 동물도 긴장하면 배설을 많이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비둘기가 무척 놀랐나 봐요. 대단한 흔적을 남겼네요."
내가 김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우연히 벌어진 길 잃은 비둘기 사건 때문이었다. 도움에 감사하다며 김 선생님이 내준 차를 마시며 비둘기에서 시작된 우리의 대화 소재는 어느새 이른 출근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레 옮겨갔다.
"선생님도 저처럼 일찍 출근하시네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별생각 없이 던진 내 질문에 대답 대신 멋쩍은 미소만을 보이던 김 선생님은 오랫동안 가슴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동안 수없이 풀었다 조이기를 되풀이했을 그 이야기 보퉁이의 단단한 매듭을 비둘기가 날쌔게 풀어헤친 모양이었다. 김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이랬다.
김 선생님이 이전 학교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평소보다 다소 늦은 8시 20분경 출근하여 보건실에 갔더니 한 아이가 배가 아프다며 보건실에 앉아 있더란다. 평소에도 아픈 아이들은 물론 그 부모와도 연락을 자주 해야 하는 보건 교사의 업무 때문에 늘 친절한 보건 선생님으로 아이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김 선생님은 당연히 아픈 아이와 대화를 시작했다. 얼굴색이나 아침에 먹은 음식으로 미루어 체한 상태임이 분명했다. 아이는 일찍 출근하는 부모님을 따라 8시 이전에 학교에 등교하는 형편이었고, 그날따라 탈이 나서 홀로 보건실에 찾아온 것이었다. 팔다리를 마사지하는 등 급한 증상의 완화를 위해 처치를 하던 중 아이는 보건실 바닥에 음식물을 토하고 말았다. 초등학교에서 보건실 바닥이나 화장실 바닥에 토하는 아이들은 꽤 흔한 편이라 김 선생님은 일단 아이를 씻기고 침대에 눕혔다. 토를 한 탓에 아이는 다소 진정되는 듯했다. 아이를 눕힌 김 선생님은 보건실 바닥을 청소했다. 곧 수업이 시작되면 다른 아이들이 물밀듯 밀려오는 게 초등학교 보건실 사정이었다. 아이의 담임선생님에게도 아이의 상태를 알리고, 아이에게 병원 치료가 필요한 경우에는 부모에게 연락해서 아이를 귀가하도록 하겠다는 협의도 마쳤다. 그러나 급체 후유증인지 아이의 상태는 곧바로 회복되지 않았고, 병원에서 진료를 더 받아보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한 김 선생님은 아이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아이 엄마는 불쑥 이런 말을 던지더란다.
"그래서, 바쁜 엄마를 지금 애 병원 가는 문제 때문에 학교로 오라는 말인가요?"
엄마와의 통화 후 한 시간쯤 지났을까. 단단히 화가 난 표정으로 아이 엄마는 보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단다.
아픈 자녀를 쏘아보며 핀잔을 주는 것도 모자라 큰 소리로 왜 아프냐며 나무라기까지 하던 엄마의 화는 아이에게로만 향하지 않았다. 보건 선생이면 8시 전에 와서 아픈 아이 치료를 해야지 어떻게 애 혼자 보건실에 있게 하냐며 악을 썼단다. 엄마의 항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김 선생님에게 사과를 요구하던 엄마의 항의는 뻥튀기처럼 한없이 부풀어 올랐다. 교장 나와라, 교감 나와라, 교장이 사과를 해라, 교육청에 민원을 넣어 담당자들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등.
"학교에서 애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고 치료를 받아 낫게 하고, 집으로 안전하게 보내야지. 그게 학교가 할 일 아닙니까? 출근해서 바쁜 엄마 불러서 애 병원에 데리고 가라는 게, 이게 학교입니까? 담당자 누굽니까? 당장 담당자를 데려와서 사과를 시키세요!"
"그리고 보건 선생이면, 애들이 등교하기 전 학교에 와서 애들을 돌봐야지. 바쁜 부모 보고 오라 가라 하는 게 말이 됩니까? 당신이 내 직장 잘리면 책임질 겁니까?"
막말이 난무했던 그날 아침 보건실 어디에도 김 선생님은 교사로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아이의 토사물을 받아내고 씻기던 김 선생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홀연히 사라졌다. 쩌렁쩌렁 울리는 아이 엄마의 목소리 앞에는 치욕과 모멸감으로 온몸이 발가벗겨진 채 불안과 자책에 떨고 있는 한 여인이 있을 뿐이었다.
그 일을 겪은 후부터 김 선생님의 출근 트라우마는 시작되었다고 했다. 오전 8시가 되면 어김없이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나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그저 지나가는 우연일 뿐이라고 수없이 되뇌었지만 계속되는 불안은 일상을 병들게 했다. 그나마 출근 시간을 오전 8시에 이전으로 앞당기고 학교를 옮기게 된 지금에야 가벼운 미소도 찾았고, 아이들과의 소통에도 예전과 같은 활력이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다고 했다.
불안을 떨쳐내고 아이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그녀의 왜소한 꿈틀거림이 어쩌면 교실에 갇힌 비둘기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에 생생한 푸른 숲과 창공을 향해 온몸을 던졌던 비둘기는 알 수 없는 유리벽에 절망했다. 김 선생님도 어쩌면 그런 유리벽에 수없이 마음을 다치고 상처를 입었을지 모를 일이다. 불신과 오해로 우리들이 촘촘하게 쌓아 올린 그 유리벽에 말이다.
김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교실로 돌아온 나는 오래된 만년필에 잉크를 채워 시 한 편을 써 내려갔다.
'담당자'
보잘것없는 솜씨로 울퉁불퉁 다듬어지지 않은 부끄러운 글이었지만 김 선생님에게 마음의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진심으로만 글을 썼다. 이런 내 마음이 통했는지 '담당자'를 읽은 김 선생님으로부터 진심 어린 감사의 답글을 받게 되었다.
나는 좋은 글을 쓸 재주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평생 아이들과 초등학교 교실을 지키며 살아온 내게 그럴만한 능력이 축적되었다고도 믿지 않는다. 다만, 내 안에 꿈틀대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글을 다른 이와 나누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 단 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공감하는 이와 글로 소통하는 즐거움과 행복을 김 선생님과 비둘기 사건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것이 소박하지만 나이 50에 내가 다시 글쓰기에 도전하고, 브런치에 내 흔적을 남기는 이유이다.
'담당자'를 쓴 후 나는 군대에 첫아들을 보내는 아빠로서의 이야기, 소소한 철학과 인문학 이야기, 과학 이야기로 담담히 브런치를 채워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