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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맹수봉 Jan 18. 2023

우울해도 아이들과의 일상은 흘러간다.

우울증치료 296일


그런 날이었다.

무척이나 지치는 날.


아침에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버거운 날.

그런 날.


그러나 그때 나를 더욱더 힘들게 하는 건  내 우울증이 더 심해졌는가? 하는 생각에 물드는 순간이다. 이제 우울증 치료 열 달이 넘어가는데도 이런 기분에 잠식당하는 아침은 여전히도 힘들다. 정신을 차리고 싶어도 점점 아득해져만 간다. 


일요일이었다.

눈인지 비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것들이 내리는 날이었다.



남편은 이른 아침부터 출근을 했고 , 우리 집 친구들도 이르게 기상을 해서 나 또한 이른 출근을 했다. 약봉지를 하나 털어 먹고 아이들은 간단히 과일을 먹였다. 밤사이 바싹 마른 설거지 그릇들을 정리했다. 뒤를 돌아보니 혼돈의 세상이었다. 이건 필시 어지르는 사람보다 치우는 사람이 게으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겠구나 하며 웃어 넘기기로 했다. (어금니를 깨물며) 발로 슥슥 책을 밀어가며 빨래를 돌리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심호흡을 했다.

괜찮다며 다독이며 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나 화가 반사작용처럼 치밀어 오른다.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 오른다. 

뜨거운 것에 손을 데이면 바로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우리 집 큰 친구가 이불에 낙서를 했다.

그걸 본 우리 집 작은 친구도 이불에 낙서를 했고 도서관 책을 찢어발겨놨다.(큰 친구 때문에 도서관 책을 자주 그리고 많이 빌려다 놓는다) 물놀이에 재미 들린 작은 친구는 화장실과 싱크대 가리지 않고 물을 틀어 놓고 손도 씻고 양치시늉도 하고 별 걸 다한다. 그렇게 옷을 열 번도 더 갈아입혔다. 엄마가 화난 걸 알아차렸는지 배시시 웃으며 다가온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그사이 초록색 크레파스를 이로 갉아놔서 작은 친구의 앞니가 녹음으로 푸르렀다. 하하.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보니 큰 친구와 작은 친구가 으쌰으쌰 싸움이 붙었다. 다행히 큰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으나 둘 다 울음보가 터졌다. 아 내 귀. 이명이 들린다.



눈구경을 하고 싶다는 우리 집 친구들.


옷을 입혀 데리고 나갔다. 우리 집 뒤에는 공원이 있는데 썰매를 타고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들기 딱 좋게 생겼다. 아이들을 깔깔거리며 눈밭을 뛰어다니고 눈을 뭉쳐 던지고 난리다.


즐겁게 노는 걸 보니 나도 덩달아 즐거워진다.


그것도 잠시.

우리 집 작은 친구가 자꾸 눈을 퍼먹는다.

여기.. 강아지들이 산책을 자주 나와서 똥이랑 오줌을 많이 싸놓는 곳인데.. 아 , 아찔하다. 아무리 말려도 눈을 활처럼 휘면서 웃음을 날려준다. 촉촉한 습기를 머금은 습설이라 더 맛이 좋았나..?


한바탕 눈놀이를 하고 집에 돌아와 누룽지를 한 사발씩 끓여주었다. 




누룽지 한 사발에 백김치 한 접시 내어준 것뿐인데 후후 불어가며 누룽지 한입을 먹고는 우리 집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엄지손가락을 척척 올려준다. 여우 같은 마누라, 토끼 같은 자식들.이라는 말이 있던데 여우마누라의 아이들이라면 여우자식들이어야 하지 않나? 그래 , 우리 집 친구들은 어쩌면 여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엄마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밀당천재들.


어찌어찌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간다. 우리 집 큰 친구가 저녁으로 김밥을 먹고 싶다고 한다. 우리 집 친구들은 '김밥!'이라고 이야기하면 뚝딱 김밥이 나오는 줄 아는 친구들이다. 정신머리를 가다듬고 대충 있는 재료들을 넣어 두줄을 말았다. 다 말고 나서 뭔가 이상해서 봤더니 단무지를 안 넣었다. 손을 10cm만 뻗으면 닿는 곳에 있는 단무지를 안 넣었다. 김밥의 핵심을 빠트렸다. 


그렇다는 건 나 지금 이렇게 정신없는 거니?..



밥을 다 먹고 양치를 시켰다. 그렇다는 것은 난 지금 큰 전쟁을 치렀다는 이야기.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책을 읽어주러 방으로 들어가는데 '바삭' 소리가 난다.


'바삭?'


땅에 떨어진 과자를 주어먹으며 아이들이 신나 하고 있었다. 이제 막 양치를 해놓고는 이에 잘 들러붙는 과자를 .. 반대쪽에서 바사삭 소리가 난다. 내 멘탈 나가는 소리. 멘탈 바사삭.. 그래 , 역시나 치우는 사람보다 어지르는 사람이 더 부지런해서 이 사단이 난거지. 그래 그런 거지. 부지런한 나의 친구들.


감정조절이 되지 않는다. 다시 한번 '화'가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와 버렸다. 열 달째 약을 먹고 있어도 이 모양 이 꼴인 게 우습기도 하고 , 그래도 열 번 화낼 거 한번 냈으니 다행스럽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를 한다. 한참을 조잘거리다가 아이들이 잠들었다. 방문을 살짝 열고 나와서 집을 대충 치워두고는 의자에 앉았다. 


'멍-'


한 시간 정도 멍을 때리니 집 나간 넋이 돌아왔다. 생각해 보면 이 전에는 집 나간 넋은 집에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었는데 , 이제는 멍을 때리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수 있기는 하다. 그래 , 나름 진전이 있긴 하구나.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낸 나에게 무한한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노력했구나 짜식.



그렇담 너에게 상을 내리노니 , 

와인 한잔과 홈런볼을 먹도록 하여라.

영어공부는 내일의 맹수봉에게 일임하고 지금 너는 미드를 한편 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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