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300일
일상의 감각이 돌아오고 있다. 가장 기쁜 건 말도 안 되는 개그감이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사실 진짜 말인지 방귀인지 모를 개그들이라 안 돌아오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친정에서 친척들이 모인 자리였다. 초등학생이던 사촌동생들은 멀대같이 키가 쑥쑥 자라나서 새나라의 어른들이 되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는 이야기가 어찌나 어색하던지.
이제 막 스물이 된 사촌 동생이 너무 고운 자태로 양발을 가지런히 인어공주마냥 앉아있었다. 불편하지 않냐 물었더니 본인은 양반다리를 하면 불편해서 앉아있을 수가 없다고 했다. 양반다리를 하면 다리가 내려가지를 않는다나 어쩐다나. 동생은 친히 나비자세로 연신 다리를 파닥거려 보이는데 정말 못볼꼴을 본 것 같았다. 으악 내 눈. 다들 그 동생의 다리를 한 번씩 눌러보고는 박수를 치고 돌아섰다. 어쩜 다리가 저렇게 내려가지 않는 거냐며.
옆에서 그걸 지켜보던 나는 말릴 틈도 없이 입을 나불거리고 있었다.
“양반이 아니라 양반다리가 안되나 보지”
그 싸해지는 순간을 잊지 못한다.
고운 심성의 작은엄마만이 ‘아하하하’하며 리액션을 보여주셨다.
왜? 뭐. 뭐가! 난 재밌기만 하고만. 아하하하
우리 집 큰 친구 사탕을 하나 달라고 했다. 안된다고 거절하자
“엄마는 똥돼지야!” 란다.
어허 이 놈 봐라.
나 : “괜찮아. 엄마는 똥돼지지만 귀여워서 괜찮아”
우리 집 큰 친구 : “아니야! 내가 더 귀여워!”
나: 아니야 엄마가 제일 귀여워. 아빠도 엄마가 제일 귀엽다고 했어. 아빠한테 물어볼래?
우리 집 큰 친구 : 아니야! 내가 더 귀여워!
나 : 그래! 아빠한테 물어보자. 아빠아빠, 엄마가 더 귀엽죠? ㅋㅋ
우리 집 큰 친구: 아니라고!!!!! 아빠 아빠!!!! 엄마보다 내가 더 귀엽지!!!!!!!!!!?
곤란한 아빠 : 어? 어 뭐 그렇지 뭐 엄마도 귀엽고 너도..
나 : (말 가로챔) 들었지? 엄마가 귀엽다잖아.
씩씩거리며 입 튀어나온 아이를 보며 혼자 피식피식 웃던 귀여운 서른일곱의 저녁이었다.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남편이 차를 지하주차장에 두고 오겠다고 했다. 장 본 거를 바로 옮기고 이것저것 하기엔 지상주차장이 더 좋아서 남편에게 왜 지하주차장으로 가냐 물었다.
“차 추워서 안돼”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갔다.
“추우면 이불 덮어주면 되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아재개그가 방언 터지듯 터진다.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는 증거가 된 것 같아 기쁘지만 영원히 봉인시켜놓고 싶던 녀석이었는데 , 세상밖으로 튀어나와 좀 난감하기는 하다. 그래도 마음속에 솟아나는 아재개그들을 눈치 보지 않고 혼자 뱉고 혼자 웃을 때마다 마음에 작은 봄바람이 이는 것 같다. 일단 우울증 환자가 웃기다는데 이것 말고 좋은 약이 어디 있겠냐며 아재개그를 두둔해 본다. 하하
부디 당신의 하루도 실없이 웃을 수 있는 것들이 이어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