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참 이상한 곳이다.
미래의 기업가, 의사, 성범죄자, 연쇄살인범, 교사, 전업주부, 부모, 예술가, 정치인 등 이
한 공간에 욱여진 상태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다.
난 당연하게도(?) 학교를 참 싫어했다.
한국 사회는 다름을 잘 인정하지 않고
그건 솔직히 다른 나라도 비슷할거라 생각한다.
결국엔 다 인간이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자기랑 비슷하고 하는 행동이 같으면 친화적으로 대하고
그렇지 않으면 배척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유난히 그게 더 심할뿐,
이 안에 첩자가 있다(We have a mole)_2020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괜찮았었다.
나는 학교에서 머리가 가장 긴 아이었고
바지에 여우꼬리 같은걸 달고 다니는 이상한 애였다.
그때는 친구들이라는게 있었고
편견없이 재밌게 지냈었던 것 같다.
고학년이 되면서 슬슬 머리가 커진 애들은 날 멀리하기 시작했고,
친하게 지냈던 애들과 하루아침에 남같은 사이가 되자 나는 적잖히 당황했었다.
그렇게 중고등학생이 되고 거의 친구가 없다시피 지냈다.
그래도 별다른 말썽은 부리지 않는 나를
선생님들은 특별히 괴롭히지 않았었다.
딱 한 명. 고3때 담임은 악마였다.
"ㅊㅁㅎ" 그 이름은 잊혀지지도 않는다.
예체능이었던 나를 그는 무참히 짓밟으며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꼭 나를 괴롭히고 지나갔다.
20년 가까이 된 지금도 그의 차를 긁는다거나,
그가 걸어가는 앞에 똥 폭탄 같은걸 놓는 상상을 한다.
그가 바나나 따위를 먹다 사레가 걸려
걸쭉한 바나나가 코로 튀어나오길 바란다.
아... 정말 이런 상상은 끝이 없다. 황홀하기까지하다.
고학력자들인 부모님 때문에
어거지로 2년제 대학에 갔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내가 그런 대학에 가자
유명한 모 대학원까지 나온 엄마는 몰래 울었다고 한다. (나참)
그렇게 성인이 되어서도 같은 수업 듣던 애중 하나는
정말 진지하게
"너 제발 그렇게 안 입고 다니면 안될까?" 라고 했었다.
그 곳에서 포토샵, 일러스트, 사진 따위를 겨우 배워 나왔고,
따로 4년제 회화 전공을 하면서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미술 교수님들은 달랐다.
수채화 수업 때 교수님은 정석대로 하지 않는 나를 보고
"내가 자네에게 C를 줄 수 밖에 없지만, 자네는 앞으로 계속 이렇게 해나가야 하네." 라고 말씀하셨고,
다른 교수님들은 점수를 잘 주셨다.
미술수업은 정말 재밌었다.
그리고 회화 공부할 때 만났던 사람들과는 지금까지도 잘 지낸다.
그들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이다.
사실 내가 제일 처음 만난 선생님은
부모님이다.
아이를 낳는건 뽑기 기계를 돌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무수히 많은 상품(?)들이 보이고
자기가 원하는게 뭔지 어렴풋이 알지만
동전을 넣고 돌리는 순간
튀어나오는게 내가 원하는게 아닐 수도 있다.
엄마는 "순종적인 뽑기"를 원하고
레버를 돌렸지만
"왜?"가 튀어나왔다.
나는 "왜?"를 입에 달고다니는 애였고,
그건 단순히 미운 일곱살의 스쳐가는 시기가 아니었다.
나의 "왜?" 때문에 엄마의 허파는 자주 뒤집어졌고,
나는 거의 매일 맞았다.
(그 당시에 맞는건 별일도 아니었다. 학교에서도 때리고, 학원에서도 때리고, 집에서도 많이들 맞았다.)
"왜 시계를 그렇게 읽어? 1시간이 60분이라고 누가 정한거야?"
"왜 꽃을 꽃이라고 써? 왜 밑에가 ㅊ이야?"
"왜 살아있는 크리스탈 꽃은 없어?"
13살에 부모님이
"사실은 우리가 산타였어." 라고 커밍아웃을 했을 때도
"왜??? 왜 산타는 없어? 왜 진짜가 아닌데?" 라며 펑펑울었다.
내가 받아들이기에 타당한 이유가 없으면 내멋대로 했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했고,
그 생각과 행동은 쳐 맞으면서도 변함이 없었다.
"왜?" 라는 질문은 항상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시키는 대로 살지말고.
어차피 사람은 다 죽는다.
"그러면 안된다는 법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