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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질소셜클럽 Jun 01. 2024

한국인은 행복하지 않은 것일까 표현을 안 하는 것일까?

즐거우세요? ㅎㅎ

항상 행복도 하위권인 한국


세계적으로 행복도 조사를 하면 한국이 유독 낮게 나오는 걸 많이들 보셨을 겁니다. 이제는 유튜브나 공중파에서도 보도를 많이 해서 다들 '한국은 행복하지 않구나' 하고 느끼기 쉽습니다. 한동안 저 또한 그랬습니다. 하지만 결과를 곱씹어 보면 볼수록 어딘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이 아무리 암울해도, 선진국에 한참 못 미칠 정도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정말로 행복하지 않아서 저렇게 답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인터뷰 응답자의 입장이 되어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만약 논현역 4번 출구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조사관이 수첩을 들고 다가와서 "행복하세요?"라고 물으면 어떤 대답을 하실 건가요? 저라면 고민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왜냐면 저도, 부모님도, 조부모님도 일상에서 "행복"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 기억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편안하다" "즐겁다" "기분 좋다"라고 하지 "행복하다"라고 말한 기억이 잘 없습니다.




달이 아름답네요

달이 아름답다(2017)


메이지 시대 영국에서 유학했다가 일본으로 돌아와 작가가 된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인의 사랑에 대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I love you는 일본어에는 없는 표현이다.
-나쓰메 소세키


이 말이 돌고 돌면서 "I love you는 일본어로 '달이 아름답네요'라고 번역해야 한다"라고 퍼졌고 일본에서는 "달이 아름답네요"라는 표현이 "사랑해요"를 대신하는 일종의 클리셰로 남았습니다.


아직까지도 일본에서는 영화나 드라마라면 모를까 일상에서 아이시테루(愛してる) 즉 사랑한다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일본인들은 이렇게 각 잡고 고백하면 뭔가 비장하다, 다시 못 볼 거 같은 느낌이다 처럼 여긴다고 합니다. 따라서 외국인이 일본에 와서 "Do you love your wife?" "Do you love your daughter?"라고 물었다면 100% 정확한 답변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분명 일본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미국이나 스페인의 사랑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다만 표현 방식이 다른 것입니다.




동양의 행복

즐겁지 아니한가?


한국인에게 있어서 "행복"도 이 아이시테루 같은 어색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부터 유교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한국에서는 즐거워하는 것을 표 내지 않고 또 지나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습니다. 무릇 군자라면 크게 동요하거나 상하면 안된다는 공자의 사상은 음악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궁중 악사들은 감정에 심취해 머리를 흔들거나 눈을 감는 것도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즐겁지만 지나치지 않고, 슬프지만 비통하지 않다(樂而不淫 哀而不傷)
-공자, <논어>


한국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던 불교 또한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 희비와 고락에서 궁극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을 목표로 했기에 겉으로 나타내는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즉 한국을 관통하는 인생철학은 서양으로 따지면 중용과 절제를 강조한 스토아 철학에 더 가까웠습니다.


행복(幸福)이라는 단어 자체도 한국에서 원래 쓰던 단어가 아니었으며 19세기 일본의 학자들이 "happiness"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들여온 것입니다. 한국에는 아마 20세기 일제 강점기에 본격적으로 전래되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행복이라는 단어가 들어온 이래 한국의 상황은 행복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식민지배, 2차 대전, 한국전쟁, 분단, 독재를 거치면서 자유, 정의, 투쟁 같은 단어가 20세기 한국사의 대부분을 지배하였으니, 오늘날 한국인의 대다수가 "행복"이란 말을 어색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개인의 행복보다 가족, 집단, 국가의 번영이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서양의 행복


Happy를 자주 사용하는 서양


반면 기독교 문명권인 유럽과 아메리카를 보면 "행복"이라는 말(happy, joy, felicite, feliz 등)을 일상에서 훨씬 자주 사용하는 편입니다. 기분이 좋을 때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축하할 때도 Félicitations, Joyeux Noël, Happy Birthday처럼 행복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한국에서는 행복이라고 하면 "행복 추구권"처럼 이상적이고 고차원적인 무언가를 떠올리지만, 서양에서는 love라는 단어가 그렇듯이 여기저기 막 써도 되는 그냥 일상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냐고 한다면 서양을 관통하는 텍스트인 성경을 들춰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무리는 크게 부르며 각과 나팔을 불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힘있게 타며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어 올렸더라 /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어다보다가 다윗왕의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심중에 업신여겼더라
- 사무엘하 6:28-29


위 장면은 많은 화가들이 그렸던 "다윗의 춤"을 묘사하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해 언약궤를 가지고 귀환하던 다윗왕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춤을 추며 자신의 아랫도리가 드러나는 것도 몰랐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미갈이라는 여인이 그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는 것만으로 저주를 받았다는 점입니다. 그 마음이 진실되기만 하면 말 그대로 정신줄을 놓고 찬양을 해도 좋다는 의미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 누가복음 10:21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 역시 사람들과 어울려 와인을 마시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무척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특히 그가 장사치들에게 분노해 예루살렘 성전의 탁자를 엎어버리는 장면에서는 평화의 신이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이렇듯 성경에 나오는 리더들과 심지어 신 본인까지도 감정 표현에 자유롭고 오히려 장려하였기 때문에, 서양의 음악과 미술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감정 표현에 더 치중할 수가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데 막을 근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감정에 더 관대했던 서양의 시각으로 동양을 바라보면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동양이 행복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는다고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닌데, 마치 없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행복의 대체품


그렇다면 입에 도저히 붙지 않아 한국에서 곁돌고 있는 이 행복이라는 단어를 대체해 버릴 수는 없을까요? 다행히도 한국에는 행복을 표현할 때 쓰는 우리 고유의 맛깔나는 표현이 있습니다.


더운 날 에어컨 바람을 맞을 때: 시원하다

뜨거운 국밥을 입에 떠 넣을 때: 시원하다

따뜻한 온탕에 들어갈 때: 시원하다

누군가 가려운 곳을 긁어줄 때: 시원하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고통받을 때: 속시원하다

답답하던 것이 풀릴 때: 마음이 시원시원하다

안 되던 일이 풀릴 때: 속이 시원하다

내 지인의 안 되던 일이 풀릴 때: 내 속이 다 시원하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행복하세요?"라고 묻지 말고,

"시원하세요?"라고 물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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