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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질소셜클럽 Jun 18. 2024

비혼은 뭐라고 번역해야 할까?

언어는 사회와 같이 변화해야 하는가?


지난 몇 년 사이 어느새 생활에서 밀접하게 볼 수 있는 단어가 된 "비혼"은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표적 신조어입니다. 1980년대까지 한국 남성과 여성은 절반 가까이가 20대에 결혼했었고 30대를 넘기면 주변에서 어떻게든 짝을 지워 결혼시키려고 애썼습니다. 그때는 옆집 윗집 아랫집 다 하는데 나만 안 하면 어딘가 모자란 사람처럼 보였을 테니까요.


반면 오늘날 한국은 35세까지도 여성의 49%, 남성의 66%가 결혼하지 않고 있는, 세계에서 거의 가장 결혼이 늦고 또 덜 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혼 생각이 애초에 없다는 독신주의자들의 삶이 처음으로 조명받기 시작했고 아닐 미(未)가 아닌 아닐 비(非)를 사용해 "결혼을 못 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다"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비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비혼은 영어로 뭐라고 번역해야 할까요?

기혼: married

미혼: unmarried / single

자발적 독신: voluntary celibacy

비자발적 독신: involuntary celibacy (혹은 줄여서 incel)

비혼: ???


가장 간단한 방법은 미혼과 동일한 "unmarried"라고 번역하는 것입니다. 영어에는 미(未)와 비(非)를 구분하는 접두사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조어로써의 비혼은 결혼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목적이므로, "자발적 독신주의자"라는 뜻에 부합하려면 voluntarily single / single by choice / celibate라고 부연 설명을 달 수밖에 없습니다. 이 중 celibate는 과거에는 수도원 등 종교적인 이유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지칭했으나 수도원에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 현대에는 신조어 "incel"처럼 일상용어로 다시 들어온 경우입니다.


왜 이런 차이점이 생겼을까요? 비혼이라는 신조어의 시작점은 한국어에 있는 부정접두사 아닐 미(未)와 아닐 비(非)가 미묘하게 다른 뉘앙스라는 주장에서 왔습니다. 동 주장에 따르면 미(未)가 수식하는 단어는 "완전하지 못함"을 뜻하기 때문에 중립적인 비(非)로 바꿔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영어와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고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아닐 미(未)는 부정적인 뜻인가?


비혼 옹호론자들의 대표적인 주장은 일상 한국어에서 아닐 미(未)가 수식하는 단어들이 "아직 하지/되지 못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마치 결혼을 당연한 목표로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아래는 아닐 미(未)로 시작하는 대표적인 단어들과 각각의 사전적 정의를 가져와보았습니다.


미완성: 아직 덜 됨.

미취학: 아이가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 못함.

미성년: 법적으로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나이.

미결수: 아직 재판이 다 끝나지 않아 죄의 유무가 밝혀져 있지 않은 채로 갇혀 있는 사람.

미지수: 아직 값이 밝혀지지 않은 수.

미납금: 요금이나 세금 같이 내야 하는데 아직 내지 못한 돈.

미확인: 아직 확인되지 않음.


일단 1차적으로만 보면 대부분의 단어들이 "아직 ~하지 않음"을 공통적으로 지칭하고 있음을 볼 수 있고 최종적으로는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거나, 재판이 끝나거나 하는 하나의 지향점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석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본다면, "지향점이 있다면, 그에 대한 능동/수동의 의미가 구분되는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풀어쓰면 "아닐 비(非)를 붙였을 때 의미가 다른 단어가 되는가?"이기도 합니다. 이에 해당될 수 있는 단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미취학/비취학: 애초에 아이를 학교에 보낼 의지가 있음/없음.

미납금/비납금: 애초부터 돈을 낼 생각이 있음/없음.


미성년/비성년의 경우 자유의지가 아니라 자동적으로 나이를 먹는 것이기 때문에 구분할 수 없습니다.

미확인, 미완성과 같은 단어들도 확인 혹은 완성이 되었거나 안 되었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에 제3의 상태가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결론적으로, 아닐 미(未)가 "응당 ~해야 하는데, 아직 하지 않음"의 뜻으로 쓰이는 단어는 소수 존재하기는 하나, 가치 판단과 상관이 없는 "~하지 않은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 또한 존재하므로, 100% 부정적인 뜻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언어는 수학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둘 다 맞는 주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다못해 "미성년"같이 당연해 보이는 단어라도, 만약 사회에 키덜트족이 많아져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금일 이 시간부로 비성년임을 선언한다"라고 선포하면 그런 단어가 생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 영어는?


한국어에서 아닐 미(未)와 아닐 비(非)가 일부 혼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어(더 나아가서는 로망스계 언어)에서도 부정 접두사 dis-, in-, un-, non- 등이 딱 떨어지는 규칙 없이 혼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unresponsive <-> irresponsive, uneligible <-> ineligible, unexpensive <-> inexpensive의 경우 현대 영어에서는 in-이 선호되기는 하나 서로 혼용 가능한 단어로 취급됩니다.


반면 영어 학습자에게는 뒷목을 잡고 싶을 정도로 부정 접두사에 따라 뜻이 아예 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Uninterested: 흥미가 없음 / Disinterested: 사심이 없는, 공정한

Inability: 능력이 없는 / Disability: 장애

Unarm: 무기, 갑옷 등을 내려놓다 / Disarm: 무기를 빼앗거나 무력화시키다


위의 대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부정접두사 in-, un-보다 dis-가 더 강하거나 직접적인 표현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한국어처럼 "미완"의 뉘앙스는 없으므로, "unmarried"를 "dismarried"라고 바꿀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언어는 사회에 따라 바뀌어야 하는가?

자발적 비혼주의자의 비율은 아직까진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비혼" "완경" "졸혼"과 같은 언어 개혁운동은 한국에서는 비교적 최근에 생긴 일이지만 로망스계 언어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있어왔습니다.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을 공부한 사람은 알지만 이들 언어에서는 문법상 남성형/여성형이 존재하고 한 문장에서 성별이 통일되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나의(여성형 소유격) 작은(여성형 형용사) 고양이(여성형 명사) 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평등하지 않다고 하여 오늘날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독일어의 경우 복수형에서 남성과 여성이 섞여 있더라도 남성형으로 통일하는 관습(das generische maskulinum)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성차별 논란이 일자 독일인들은 *(별표)를 발명해 단어에 끼워 넣어서 성별 중립적 복수형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스페인어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논란을 피해 가기 위해 latin@s, latinx 등 남성, 여성형을 어떻게든 한 단어에 포괄해 보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영어에서도 businessman, salesman 등 통용되었던 남성형 칭호를 대체하는 추세입니다.


동아시아 언어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한자 역시 젠더 논란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여성이나 남성, 어머니, 아버지를 뜻하는 한자가 부수로 쓰인 수많은 한자들은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상을 일부 대변합니다. 대표적 예로 혐오에 쓰이는 혐(嫌)은 "여자"와 "겸하다"는 한자가 합성된 것으로. 옛날 아내나 첩을 여럿 두었던 봉건시대에 정실부인과 측실부인 사이에 일어났던 갈등을 표현했다고 봅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납득이 가는 부분이지만 여성비하적 표현이 조금이라도 담긴 언어는 폐기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만약 그래야 한다면 간사할 간이나 혐오할 혐을 대체할 새 한자를 만들어야만 하겠죠.


언어는 모두가 합의해야만 사용할 수 있는 관습이지만 동시에 시대와 집단에 따라 변화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비혼이라는 단어의 쟁점은 단순히 한 단어가 아니라 더 큰 사회적 함의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혼용해서 쓰지만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 미혼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면, 미혼이라는 단어 자체가 대체되는 날도 올지 모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시대상에 맞지 않는다면, 다수의 동의가 없어도 그것을 변경해야 하는가? 변경한다면 누구의 권위와 절차에 따라 변경하는 것이 맞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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