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브라질소셜클럽 Jul 01. 2024

피해의식과 일반화에 사로잡힌 사회

너 ㅇㅇ지?

로이 리히텐슈타인


피해망상증 혹은 조현병 환자와 길게 얘기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직업상 간혹 이런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는데 늘 뭐라 반박하기가 힘든 정신이 혼미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에 기반해서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그들의 사고의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발단: 며칠 전부터 집 주변에 경찰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건: 어제 집에 가는데 경찰차가 나를 불러 세웠다.

피해: 그 과정에서 경찰이 나를 강압적으로 대해서 기분이 나빴다.

결론: 미국 정부와 경찰이 힘없는 아시안 여성인 나를 감시하고 있으며 해코지하려고 한다. 도와달라.


그녀가 겪은 사건과 피해는 분명 실제로 일어난 증명이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피해망상증 환자들이 저런 결론에 도달하는 사고방식은 늘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피해의식: 나의 젠더, 인종, 나이, 외국어능력, 학력, 생김새 등 특정한 이유로 나는 상시 차별받고 있으며 내가 받는 피해는 모두 차별, 무시에서 온 것이다.

일반화: 나에게 피해를 끼친 젠더, 인종, 집단, 국가는 모두 일반화가 가능한 같은 무리이며 잠재적 가해자이다.


이 둘은 높은 확률로 같이 나타나며, 저와 얘기한 모든 피해망상 환자들은 항상 더 거대한 가해자 집단을 지목하였습니다. 그 배후는 시장, 의원 같은 권력자나, 정부, CIA, FBI, 심지어는 빌 클린턴(...)도 있었습니다. 즉 이런 환자들은 작은 피해를 당해도 앞뒤 다 자르고 거대 집단을 지목합니다. 그 상태가 더 심각해져서 피해가 아닌 것을 피해라고 확대 해석(예: 오늘 에어컨 소리가 이상한데 독가스를 살포한 것 같다) 하는 수준까지 가면 내원치료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사고방식은 국가적 피해의식으로 발현되는 경우도 있으며 그때마다 끔찍한 인명 피해를 동반했습니다.


피해의식: 독일 제국은 정당하게 진 것이 아니라 내부의 유대인들에게 뒤통수를 맞고 배신당한 것이다.

일반화: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안 그래보여도 속으로는 모두 똑같은 족속들이다.

비인간화: 유대인들은 인간도 아니며 가축, 벌레처럼 우리나라에서 추방되거나 숙청되어야 마땅하다.



이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 우리 사회에 돌고 있지는 않은가요?



실제 피해 빈도와 피해 불안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출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ESS ERIC


인간의 이러한 본성은 분명 진화를 통해 발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피해의식과 가해 대상을 일반화하는 습성은 독이 든 먹거리를 피하거나 위험한 짐승, 곤충에게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걸 대표하는 한국 속담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입니다. 한번 무언가에 피해를 당하고 나면, 그것과 조금만 비슷해 보여도 본능적으로 도망가거나 적대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존에 도움이 되었던 피해의식과 일반화는 오늘날 극좌, 극우처럼 타협이 없는 적대적 사회를 만들어냈을 뿐입니다. 역사에서 늘 그랬듯이 전쟁이나 혁명, 선거에서 이기려면 분명하게 선을 긋는 쪽이 유리합니다. 그러다 보면 "너 단어 선택이 좀 이상하다?" "너 ㅇㅇ지?" 처럼 사상 검증에 들어가야 하고 단 몇 가지 데이터만 가지고서 딱지를 붙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은 급진주의자가 아니며 여러 가지의 사상이 혼재되어 있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출처: 약치기 그림


한 예로 가상의 50대 남성 대표를 들어 봅시다. 그는 출산 휴가, 휴직에 부정적이어서 임산부들도 눈치를 보며 나와야 합니다. 동시에 그는 일 잘하는 여성 직원들을 후하게 포상하고, 무거운 것을 나르거나 긴 거리를 운전하는 일은 미혼 남성 직원을 시킵니다. 집에서 그는 아내의 말을 전적으로 따르며 경제권과 투자를 모두 위임하였으며, 딸에게는 최고의 교육을 시키고자 보스턴의 비싼 사립학교에 보냈습니다. 그에게 남는 돈은 거의 없어 주말마다 낚시 가는 것이 유일한 낙입니다.


그럼 이 대표는 한 마디로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요? 여혐? 꼰대? 스윗586? 가부장? 보시다시피 그는 어떤 여성은 우대하고 어떤 여성은 차별하며, 그렇다고 남성을 차별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집안에서는 가부장의 권위를 내려놓았으나 사회에서는 "꼰대"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물며 위대한 종교 지도자, 철학자들도 겉 다르고 속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일반인들의 언행이 완벽히 일치할 리는 없습니다. 결국 이런 식의 편 나누기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처럼 아무 진전없는 소모적인 논쟁일 뿐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입장에서 이 남성 대표를 바라보고, 모두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모두 다 헛짚은 것입니다.



우리는 단편적인 사건, 언행을 가지고 일반화시키려는 무리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은 모두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실존 인물을 내세우며 "저거 봐, 또 같은 일이 일어났어" 처럼 팩트라고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논쟁을 위한 논쟁, 구독자수를 위한 편가르기에 불과합니다. 그리고선 여러 사건을 가져오며 "이것이 빅데이터"라고 주장하는데 빅데이터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 중 실제로 엑셀에 데이터가 저장되어있다거나 회귀분석(regression)으로 인과관계 분석을 한 경우는 보지 못했습니다. 편견을 편견이라고 부를 수 없으니까 데이터 기반이라고 교묘하게 포장한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 이들은 한국에 피해를 주려는 잠재적 적국의 정보전과 연관되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유투브로 세상을 배우게 될 어린이들이 걱정되기만 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혼은 뭐라고 번역해야 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