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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질소셜클럽 Nov 20. 2024

젠더갈등이 매번 제로섬 게임으로 전락하는 이유

할당제의 한계에 대하여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진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노예 해방, 여성 참정권, 흑인 투표권 등 소수자의 인권 상승이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예시를 봐왔습니다. 극도로 불평등한 사회는 반드시 낮은 생산성과 범죄 등의 악영향을 불러오게 되며, 노예보다 자유민이 생산성이 더 높다는 것은 전근대인들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공정하고 투명한 사회를 만드는 일은 단순히 그것이 도덕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사회에 선순환 구조를 가져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동의 자유가 존재하는 한 불평등 사회는 필연적으로 인재와 생산성을 잃은 채 고립, 도태됩니다.


위와 같은 주장에 대부분 사람들이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일지 모르지만, 정작 이권이 걸려있는 입학, 군대, 취업 문제에 직면하면 "나의 것"과 "너의 것"으로 이분법적 사고에 매몰되는 모습을 봅니다. 사실 이런 식의 소모적 밥그릇 지키기로 젠더 갈등이 매번 귀결되는 데에는 국가와 기관의 책임도 있습니다. 왜냐면 차별을 해결하고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정책의 성격이 할당제이고, 대부분의 할당제는 그 특성상 제로섬 게임에 매우 가깝기 때문입니다. (제로섬: 반드시 이기는 사람이 있고, 지는 사람이 있는 시스템)


서울대와 4대그룹 할당제 예시 (진학닷컴, 한겨레, 2024)


이전 글에서 할당제의 명분과 목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고 소개한 바 있습니다.

1) 교육적: 이 집단의 진학률과 고등교육 졸업률이 얼마나 높은가

2) 경제적: 이 집단의 소득과 자산이 얼마나 높은가

3) 사회적: 평소에 이 집단이 공적 혹은 사적으로 얼마나 차별대우와 혐오를 받고 있는가 (1번, 2번이 충족되고 나서도)


오늘날 한국과 미국에서는 소수자의 학력, 소득,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하여 주로 다음과 같은 할당제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1) 교육적: 소수자들이 우수한 학교에 더 수월하게 들어가고 수학할 수 있도록 전용 장학금을 만들거나, 커트라인을 낮춰서라도 더 뽑는다

2) 경제적: 많은 지원자가 몰리는 선호 공기업, 대기업에 소수자들이 더 많이 들어갈 수 있도록 쿼터를 정해놓거나, 커트라인을 낮춰서라도 더 뽑는다

3) 사회적: 더 많은 소수자들이 매니저, 리더, 이사진이 될 수 있도록 승진에서 배려한다 (사기업에서 강제성은 없으나, ESG 리포트에서 대개 리더십과 이사진의 성별, 인종 구성을 투명하게 공시하기 때문에, ESG 경영의 주요 지표(KPI)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음)


위 예시가 제로섬 게임을 유발하는 이유는 바로 전체의 파이가 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수자 정책을 시행하면서 명문대학의 정원이 늘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공기업, 대기업의 모집 인원, 승진 TO 역시 매 해의 실적과 경제지표에 따라 계속 변동되며, 채용이 늘어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할당제가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학교와 기업은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엘리트 집단이고, 엘리트 집단의 특성상 인원수가 줄면 줄었지 크게 늘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할당제를 시행했을 시 높은 확률로 누군가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입니다.


하버드대 시위 현장, 2018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재판까지 갔던 하버드대의 아시안 역차별 케이스였습니다. 대학 정원은 늘리지 않으면서 소수자 비중을 보장하려다 보니 수많은 우수한 아시안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2023년 미국 대법원에서 위법 판정을 받았습니다. 하버드처럼 돈이 넘쳐흐르는 기관도 정원을 늘리는 선택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면, 다른 엘리트 집단도 비슷한 결정을 할 것이라 추측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사람을 덜 뽑아서 더 남겨야 하는 사기업은 정원을 늘릴 이유가 더더욱 없습니다.


할당제가 가장 효과적일 때는 인도의 예시처럼 격차가 눈에 띌 정도로 심할 때입니다. 1950년대 인도에서 할당제 논의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전기도 물도 없이 비참하게 사는 천민들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쟤네 너무 불쌍하니까 조금만 도와주자"라고 제안할 수 있었고 큰 반발 없이 국민들에게 통과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너도 나도 거기에 끼워달라는 반발이 커지고 정치인들이 표심을 의식해 통과시켜 주면서, 중산층에 근접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까지 자신을 소수자로 격하시켜 달라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인구의 50% 가까이가 소수자가 되는 바람에, 결국 소수자에 못 끼는 사람만 손해 보는 사회가 오늘날 인도의 딜레마가 되었습니다.


즉 비유하자면 할당제는 소 잡는 칼이지 닭 잡는 칼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국민 평균에 근접한 사람들까지 일일이 챙겨주다 보면 정작 할당제가 보살펴줘야 할 진정한 약자들을 놓치게 됩니다. 한 예로 아무리 장학금이나 지원 프로그램이 있어도, 가정이 붕괴된 집의 가난한 아이가 그 정보를 접하고 거기에 지원할 확률은 낮습니다. 오히려 이런 프로그램일수록 그 소수자 집단에 속해있으면서 소득이 상대적으로 높은 집안의 아이들만 도와주는 일을 하게 됩니다. 소득과 정보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책을 만들면 나이지리아왕족이나 인도네시아의 재벌가 자녀를 우대해 주는 터무니없는 결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갈수록 늘어나는 미국의 인도인 CEO들


마지막으로 생각해봐야 할 지점은 교육적, 경제적 성취가 항상 차별의 해소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동남아시아, 동아시아계 미국인들은 가장 높은 교육 성취도와 소득 수준을 달성했지만 그렇다고 사회에서 무시와 혐오발언이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왜냐면 30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인들이 본 아시안들은 세탁소,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들이 의사, 엔지니어, 교수가 되었어도 편견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국회의원, 사업가의 자리까지 올라간 불가촉천민(Dalit)들이 존재하지만 그들과 손도 잡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없어지진 않았습니다.


교육격차, 소득격차가 어느 정도 해소되고 나서도 존재하는 이러한 차별은 할당제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의식의 성숙도와 정치 참여도를 통해 다루어야 합니다. 이 과정은 당장 내일 시행할 수 있는 할당제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리며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지만, 소수자가 동등한 사회의 일원으로 가기 위한 필수적 마지막 단계입니다.


미국 내 아시안들이 성공한 의사, 변호사, 교수가 되는 데는 한 세대면 충분했지만 그들이 이민자 취급을 받지 않는 시대가 오려면 여러 세대가 걸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개인이 아무리 성공했다 한들 사회의 인식이 그대로라면, 더 많은 하버드대생, 더 많은 의사, 더 많은 CEO를 배출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진 못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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