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안나 Aug 02. 2020

<어톤먼트>

     




  2008년 국내 개봉한 영화 <어톤먼트>(2007)는 <오만과 편견>, <안나 카레리나> 등을 연출한 조 라이트 감독이 영국 작가인 이안 매큐언의 소설 『속죄』(2001)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이안 매큐언은 맨부커상을 비롯한 영미권의 주요 문학상을 모두 휩쓸며 향후 노벨문학상 수상이 가장 강력하게 점쳐지고 있는 작가 중 한 명이며, 그는 『속죄』를 통해 부조리한 세계 속 다양한 인간의 심리를 특유의 날카로운 필력으로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깊이 있는 원작에 조 라이트 감독의 감각적이고도 섬세한 연출과 키이라 나이틀리, 제임스 맥어보이, 시얼샤 로넌을 비롯한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력이 더해져 영화 <어톤먼트>는 골든 글로브 시상식을 비롯한 미국과 영국의 주요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포함한 여러 상을 수상하였다.





  영국의 부호 탈리스 집안의 막내딸인 브라이오니는 가정부의 아들이자 탈리스 가의 후원으로 언니 세실리아와 같은 대학을 나온 로비 터너에게서 세실리아에게 전해주라는 편지를 부탁받는다. 낮에 일어난 사고에 대한 사과의 마음을 전하고자 했던 로비는 실수로 세실리아에 대한 음란한 상상을 장난 삼아 쓴 편지를 봉투에 넣어 브라이오니에게 건네주었고, 작가를 꿈꾸는 호기심 많은 소녀가 몰래 봉투를 열어보는 순간, 그의 편지는 판도라의 상자가 되어 세 사람 모두의 운명을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몰고 가게 된다. 잘못 전해진 편지가 부른 오해는 서재에서 사랑을 나누던 로비와 세실리아를 목격한 어린 브라이오니에게 로비가 세실리아를 성적으로 능욕했다는 왜곡된 신념을 심어주게 되고, 탈리스가의 장남 레온의 방문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파티에서 벌어진 사촌 롤라의 성폭행 사건의 범인으로 로비를 지목하게 만드는 사악한 저주가 된 것이다. 이렇게 세 사람의 의식을 지배하는 엇갈린 생각들은 소통을 가로막고 브라이오니 자신의 인생을 포함하여 타인의 삶까지 철저히 망쳐놓게 된다. 



  브라이오니는 자신이 어렸기 때문이라고 변론한다. 물론 그녀는 미성숙한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였다. 자신이 상상하고 짐작하는 것이 진실이고 사실이라고 믿는 오만이 가장 큰 잘못이었으나, 무의식 중에 자리 잡은 계급의식에 기반한 편견을 브라이오니는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녀적인 감성으로 품었던 로비에 대한 마음이 언니와의 로맨스를 바라보는 비틀린 시선으로 마치 자신이 언니를 지켜내야 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고, 자신의 상처 난 마음을 로비에 대한 확신 없는 증언을 지속하고 그를 감옥에 보냄으로써 회복시켰다. 그러나 간호사가 되어 전쟁의 참상을 간접적으로 보면서 그녀의 로비에 대한 죄책감은 점점 커지게 되고 그녀를 끝없이 괴롭히던 흐릿한 죄의식은 롤라와 마샬의 결혼을 통해 뚜렷해진다. 이러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글로써 로비와 세실리아에게 죄 갚음을 하려 집필한 소설에서 브라이오니는 13살 이후부터 비겁한 도피와 자기 연민에 빠져 결코 평온하지 못하였음을, 평생의 시간을 속죄 속에 살았음을 고백한다.






  영국 상류층 여성 특유의 오만함과 유약함이 공존하는 세실리아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로비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자신의 감정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사가 되고자 자신을 멀리 떠나게 될 로비 앞에서 더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던 그녀는 오히려 괜한 투정으로 로비를 불편하게 만들고, 이러한 세실리아의 행동은 로비가 탈리스가를 상징하는 화려한 꽃병의 손잡이를 부러뜨리는 실수를 저지르게 한다. 이러한 소통의 부재와 각자의 어긋난 생각들로 인한 사랑의 가슴앓이를 겪은 세실리아는 이제 막 로비로부터 사랑을 고백받고 처음으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였지만, 브라이오니에 의해 감옥에서 전쟁터로 끌려가게 되는 로비를 기다리다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안타까운 사랑의 주인공으로 묘사된다. 성폭행범으로 오인되어 끌려간 로비로 인해 전통적 가문의 배타적이고 위선적인 이데올로기에 환멸을 느낀 세실리아는 이후 간호사가 되어 가족들과는 단절한 체 로비를 기다리며 살아가는데 사건의 진범으로 집안일을 도와주는 하드만의 아들 데니를 지목하는 아이러니를 보인다. 





  탈리스 저택 가정부의 아들이자 잭 탈리스의 도움으로 케임브리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의대에 진학할 꿈에 부풀어 있던 청년 로비는 어린 시절부터 늘 마음에 두었던 세실리아에게 어렵게 마음을 드러내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였지만, 브라이오니의 오해로 전쟁터로 끌려가게 되는 권력과 계급의 희생자이다. 기존의 위계질서에 강한 거부감을 갖게 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문명의 폐허와 참상 속에서 시시각각 생명의 위험을 느끼며 자신의 명예와 미래를 되찾고 세실리아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는 소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이러한 로비는 이후 세실리아를 방문한 브라이오니를 통해 당시 진실에 침묵하고 동조한 기득권자들의 조종이 컸음을 알아채고 분노하지만 그 또한 롤라를 강간한 범인으로 허드만의 아들 데니를 의심한다. 이는 로비 또한 자신과 같은 힘없는 자를 피해자로 만드는 시선을 지니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개인과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팽배한 계급의식과 차별의식이 모두의 사고에 단단히 뿌리 박혀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로비가 겪어야 했던 고난의 근원에는 이러한 계급의 코드와 아버지라는 상징성과 연결된 적출의 구별이 숨어있다. 세실리아와 로비가 오랫동안 서로 자신의 감정을 명확하게 깨닫지 못했던 것도 이와 같은 계급의 장벽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롤라의 성폭행범으로 로비가 지목당하고 브라이오니의 증언으로 인해 로비의 항변이 묵살된 것은 계급의 층위가 젠더의 층위보다 높으며 아버지가 없는 로비에게는 한없이 불리한 세상임을 보여준다. 그 누구도 주인집 아들 레온의 친구인 부호 마샬이 강간의 진범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진실을 알고 있는 롤라는 브라이오니의 잘못된 증언에 침묵하고 이후 마샬과 결혼함으로써 막대한 재력을 소유하게 된다. 결국 아무 죄도 없는 로비는 성폭행범이란 오명을 뒤집어쓴 채 감옥에서 전쟁터로 끌려가야 했고, 세실리아에게 돌아가고자 애썼지만 가슴의 부상을 치료하지 못하고 패혈증으로 사망하게 된다.





  전쟁은 인간의 이성과 의지를 마비시키고 모든 도덕적 가치마저 붕괴시킨다. 롤라의 성폭행범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재앙을 재산 축적의 기회로 삼은 마샬은 비도덕적인 인물이며 군용 초콜릿 바로 전쟁 중에 대부호가 된 전쟁광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전쟁으로 인해 수없이 죽어간 생명들 위에서 엄청난 부를 쌓고 사회의 기득권자로 군림하며 이러한 불평등의 역사를 계속 써나가게 된다. 더 이상 전쟁에서 선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인륜적이고 비극적인 참상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훼손되고 악마적 근성은 고개를 쳐드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힘은 거대하다. 그 어떠한 진실도 자본주의의 그늘에 가려 사장될 수 있음을 브라이오니는 롤라의 결혼식에서 뼈저리게 깨닫는다. 지금이야말로 사람들 앞에서 그동안 자신이 겪은 고통과 번민을 솔직히 털어놓음으로써 자신이 저지른 죄로부터 영혼을 깨끗이 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롤라의 긁힌 상처와 멍은 이미 오래전에 치유되었고, 자신이 한 증언과 지금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제단 앞에 서 있는 신부는 강간의 희생자처럼 보이지 않았고, 강간의 피의자는 결혼으로 면죄부를 받은 자로 아모 초콜릿 바를 만들어낸 초콜릿 업계의 거물이었다. 자본주의에 최상위층에 자리 잡은 그들은 그들에게 위협이 되는 모든 것들은 쉽게 제거할 수 있었다. 브라이오니는 과거 자신의 말 몇 마디로 전도 유한 청년 로비를 감옥에 보낸 것처럼 자신 또한 그들의 제물이 될 수 있음을 통감한다. 





  시간이 흘러 1999년 런던, 77살의 노작가 브라이오니는 자신의 21번째 소설 『속죄』에 관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혈관성 치매를 선고받은 시한부 환자임을 밝힌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에게 『속죄』는 마지막 소설이자 그간 수없이 많은 탈고를 거쳤던 첫 번째 소설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또한 『속죄』의 모든 내용은 진실이며 인물들의 이름들까지 실명을 사용하였음을 밝히고,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진실보다 더 절실했던 속죄 하고픈 형상을 담아냈다고 고백한다. 1940년 이후의 이야기는 모두 허구로 자신은 차마 용기 내어 세실리아를 찾아가지 못했고, 로비와 세실리아는 자신의 잘못된 증언으로 인한 헤어짐 이후 다시는 재회하지 못했음을 밝힌 것이다. 로비는 1940년 6월 1일 덩케르크에서 후송되기 바로 전날 패혈증으로 죽었고, 세실리아는 같은 해 지하철 위 수도관에 투하된 폭격으로 인해 수장되어 죽었다. 그리고 브라이오니는 그들이 마땅히 누렸어야 했을 사랑에 관한 추억을 안겨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어톤먼트>는 1935년 갓 대학을 졸업한 로비 터너와 세실리아의 사랑을 비극으로 몰고 가는 사건으로 시작되어 동생 브라이오니의 잘못된 증언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과 엇갈린 운명들이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상황과 참혹함을 거쳐 1999년 죽은 연인에 대한 노 작가의 황혼의 속죄와 회환으로 끝이 나게 된다. <어톤먼트>는 작품 속 소설 쓰기에 대한 사색과 허구 속 허구를 보여주는 변형된 액자 구성을 취하며 극 후반부에 이르러 모든 이야기가 브라이오니가 집필한 속죄의 글임을 독자들은 알게 된다. 글로써 용서를 빌었다고 해서 속죄가 이루어질 수는 없다. 이미 로비와 세실리아는 죽었고,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부조리와 불평등은 속죄의 대상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 영화 <어톤먼트>가 재현하는 불합리하고 잔인하며 모순으로 가득한 세계는 13세 브라이오니가 창조했던 권선징악적인 동화의 세계와는 다르다. 전쟁은 아름다운 청년 로비와 세실리아를 죽게 하고 로비의 인생을 망가뜨린 폴 마샬을 백만장자로 만들었으며, 모든 파국의 시작이었던 성폭행의 피해자였던 롤라가 피의자인 마샬과 결혼을 함으로써 두 주인공이 겪은 고통과 죽음의 의미마저 잔인하게 훼손시켜버린다. 이처럼 영화 <어톤먼트>가 탐구하는 것은 모든 비극을 초래하는 인간의 어두운 본성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 그리고 이러한 부조리한 세계를 고발하고 새롭게 창조하고자 하는 작가의 글쓰기 행위이다. <어톤먼트>는 오해와 편견으로 얼룩진 인간관계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엇갈린 생각들이 개인의 의식을 어떻게 지배하고 서로 충돌하며 얼마나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세밀하게 보여주며, 범죄로 연결되는 것들이 폭력만이 아니며 오해와 오만이 사람들의 인생을 얼마나 처참하게 파괴할 수 있는가를 반성적 성찰을 통해 심도 있게 그려낸다.      




        


작가의 이전글 감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