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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Apr 02. 2024

폭군 열등감 다루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동전의 양면이다

열등감을 잘 소화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머리 좋은 지능자들에겐 다루기 쉬운 사람들로 분류된다.


인간에게 미움, 다툼, 원망, 시기, 질투 등 감정과 탐욕 같은 본능이 있다는 것, 이것은 인간이 얼마나 치명적인 취약성을 갖고 태어났는지 잘 보여준다. 이는 야수와 같은 세상에서 맨살 같은 약점을 드러내 놓고 사는 일이기도 하다. 그중 열등감은 보편적이며 인간 모두가 짊어지고 사는 시한폭탄 같은 취약점이다.


나 역시 가난과 결핍이란 조건만 보자면 열등의 필요충분 조건을 갖추고 태어난 사람이다. 11명 식구가 9평 집에 살았고 집이 가난해 중학교 때까지 영세민(지금의 기초생활수급자)이었다. 어머니는 아예 학교를 안 나오셨고 아버지도 초등학중퇴로 서울 상경 후엔 목수요, 막노동으로 사셨다.


아버지는 서열 6번째로 태어난 내가, 오빠 다음으로 또 다른 아들이길 바라셨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그 마저도 충족시켜 드리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는 유독 밤마다 울어 제끼는 나를 생후 6개월에 방에서 부엌으로 내던져 하마터면 죽거나 장애자로 살 뻔했다. 다행히 부엌에 있던 둘째 언니가 정확하게 받아서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열등감이란 취약성이 나를 괴롭히고 반사이익 사냥꾼들에게 휘둘러 인생을 낭비하기 딱 좋았다. 다행히 국민학교 6학년때부터 종교를 갖게 되면서였을까, 아니면 열등감에 그다지 휘둘리지 않는 단짝 절친 친구를 만나서였을까. 이 오래된 고질병에서 점점 벗어나게 되었다. 그 비결은 본글 하단에서 언급하겠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열등감의 폭격을 받았다. 열등감은 내가 자라는 속도보다 더 빠른 가속도로 자라 주인인 나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열등감은 인간 모두의 유년시절 죽마고우이며 익숙한 습관이고 진절머리 내면서도 소중하고 내밀한 평생 친구이다.





열등감은 칭찬에 취약하고 과대평가에 화색이 돈다. 자신이 남몰래 질투하던 기득권층을 대놓고 타도하겠다는 사람이 등판하면, 그 사람이 어떤 정체의 사람인지 검증할 필요도 없이, 그 프레임 하나만으로 '좋은 사람'으로 추켜 세워준다. 나는 소심하고 겁이 많아 대놓고 말도 못 했는데, 대리해서 속을 다 풀어주니 얼마나 앓던 이가 빠지는 느낌이겠는가. 열등감을 피해의식으로 환전하고 또 피해의식을 열등감으로 증폭시키느라 속이 곪을 대로 곪은 사람들에겐 그들이 영웅인 것이다. 이런 인간의 취약점을 가장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 정치인이다. 열등감은 때로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사고를 마비시킨다. 열병 수준이다. 


오랜 인류의 역사는 우월인자와 열등인자 논쟁으로 쉴 새 없이 달려왔다. 시대나 상황, 사람마다 포장지를 바꿔 옷을 달리 입혔을 뿐 내내 이 열띤 주제는 기관차의 폭주처럼 인류 역사의 숱한 레일을 달려왔다.


성경의 창세기엔 이런 논쟁의 최초의 기원이랄 수 있는 사건이 나온다. 가인과 아벨의 살인사건이 그것이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고 하나님은 그의 피제사를 기쁘게 받으셨다(창 4:4). 반면 하나님은 가인이 예물로 드린 땅의 소산(곡식)은 거절하셨다. 이 같은 하나님의 선택 이유에 대해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다.
 
ㅡ 중략 ㅡ

이에 대해 성경은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히 11:4)고 하였다. 이 일 후 가인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미움 가득한 마음으로 동생 아벨을 살해한다(창 4:5-8). 예수께서는 아벨의 죽음을 최초의 순교로 인정하셨고(마 23:25; 눅 11:51), 사도 요한은 ‘가인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롭다’고 밝혔다(요일 3:12). 또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의 죽음을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죽음의 모형으로 간주하고 있다(히 12:24).  

출처: 아벨1 [Abel] (라이프성경사전)


가인과 아벨은 형과 남동생 곧 인류 최초의 혈연 관계인 가족이었다. 가인와 아벨은 각각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아벨과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제물은 거절하셨다. 가인은 왜 자신의 제사만 거부되었는지 몹시 분개했고, 그 화를 견디다 못해 동생 아벨을 죽인다. 인류 최초 살인의 원인이 열등감과 질투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상엔 이른바 승자라 일컫는 사람보다 스스로 패자를 자인하고 또 승자를 질시하는 사람들이 다수다 보니 기이한 여론이 형성되어 왔다. 운 좋게 승자의 레일에 올라타 온갖 기행과 폭압으로 폭주하던 부자나 성공자들, 그들은 민중을 폭압하는 악의 축이였다. 그런데 아는가? 그런 폭압적인 사람들 중 다수가 실은 밑바닥에서 올라온 이른바 열등감에 인이 박힌 사람들이었던 사실을 말이다.


직장일사람들을 만날 때면, 이 사람이 미래에 성공하면 또는 실패하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궁금해진다. 상사가 되면 부하직원을 상당히 괴롭히겠다 아니면 존경받겠다, 이런 추정 말이다.


부하 직원에게 갑질하는 상사나 재벌, 명성가들의 대다수가 치유받지 못한 열등감의 소유자인 것을 아는가?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일수록 열등감에 더 취약하다. 내 20대 때 그런 말이 유행처럼 회자되었다. '전국 대학교에서 가장 열등감에 절어 사는 사람들이 서울대생이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다소 비약인 것 같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열등감을 굴레처럼 고 태어났다. 다만 중간에 그것을 잘 숨길 포장지를 얻어내느냐 따라 그 열등감이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흉악한 범죄자들이 죄의식 없이 뻔뻔하게 침 튀기듯 말하는 피해의식. 그것은 자기 열등감을 사회문제로 포장하려는 어리석은 시도 중 하나이다. 한편 우월한 기득권자들의 갑질적 폭언은 모든 민들의 분노를 폭발시킨다. 근데 주변을 잘 둘러보면 열등감으로 세상을 언어로 잔혹하게 난도질하는 악성 댓글, 폭언, 글은 웬만한 갑질 언어를 능가한다. 그래 혹자는 열등감과 우월감은 동전의 양면으로 그 속성이 같다 .





동일한 재능과 업무처리 능력이지만 이 열등감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평가를 받게 된다. 열등감을 잘못 소화하는 증상 중 대표적인 예는 '남 탓' , '상황 탓' ,  '나라 탓',  '가정환경 탓', '회사 탓' 탓이 많다는 것이다. 자신의 결핍에 대해서 외부에서 원인을 찾는 사람, 그들은 희한하게도 비뚤어진 상황과 조직 안에선 오히려 힘을 얻는다. 열등감의 화신들은 가끔 뒷담화나 극우 커뮤니티의 선동자 내지는 파워 인플루언스가 되기도 한다.


히틀러는 독일의 폐색을 유대인 탓으로 돌렸고 그 정신병적 선동은 놀랍게도 일시적으로나마 성공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 열등감에 대해서, 본인이 다 짊어지기를 본능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열등감이 집단합으로 뭉치면 한 민족을 말살하는 폭력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유대인이 열등한 DNA라서 없어져야 한다 주장했던, 히틀러와 독일 나치의 외침은 오히려 반대라는 통계자료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유대인을 악명 높은 상인으로 환원한 소설 속 기원은 잠시 미뤄 두고 보자. 세계 경제를 주무르고 역대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민족이 유대인이다. 그들 민족의 인격적 성숙 여부나 기독교와의 상충 이슈를 차제에 두고 본다면, 히틀러의 선동에선 도리어 수천 년 전 가인의 모습이 오버랩되지 않는가. 놀라운 것은 독일 히틀러의 열등감으로 촉발된 '홀로코스터'라는 고통스런 터널을 지나온 유대인, 그들이 지금은 동일한 모습으로 팔레스타인에 폭력을 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대인의 선민의식이라는 우월의식이 실은 열등감에 기인했으며 그 뿌리 또한 지독한 교만임을 보여주는, 역사의 악순환 그 전형적인 모습이다.


열등감에 깊이 침잠된 사람들, 그들은 건강한 조직에서는 반대로 암적인 존재로 자라난다. 조직 내 가십을 양산하고 파벌을 만들며 동료관계를 이간질한다. 상사와 부하직원 사이를 '편 가르기'하듯 이분법적 논리로 무한반복 왜곡시킨다. 자기 업무에 대한 질책은 자기 부족 때문이 아니라 무조건 상사와 회사 탓이다.


재직 회사에 대한 익명 평가 플랫폼 <블라인드>가 한창 인기가 있다가 조금 시들해진 것 같다. 인재 관련 일을 하는 나에게도 그 커뮤니티의 여론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인사 담당자들도 가끔 몰래 잠입해서 블라인드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를 듣는다. 그러나 나는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았고 초기에 서너 개 리뷰를 읽고는 일체 읽지 않았다.


미안한 얘기지만, 조직에서 건강한 가치관과 자아상을 갖고 있는 좋은 직장인들이라면, 그런 류의 플랫폼에 글을 쓸 시간이 없고 또 씌여진  글에도 그다지 의존하지 않는다. 그럴 시간에 자기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조직에서 불협화음을 냈던 자신에 대해 성찰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악성 댓글과 극성 커뮤니티를 배회하는 대신 인격수양을 위해 책, 종교, 스트레서 해소, 봉사 활동 등 생산적인 토양에 힘을 쏟을 것이다. 이런 이들이 결국 나중에 승진자가 된다. 승진자들을 아부와 줄대기로 보는 고전적인 시각 역시 열등감과 질투가 만들어낸 프레임일 때가 있다. 물론 10명에 1명은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회사가 바보인가, 비싼 돈 주고 무능력한 사람을 승진시켜 주게 말이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겸손하다 생각하는가? 아니다, 열등감에 찌들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당히 교만하다. 내성적이어서 또 처세술로 잘 포장할 뿐 교만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중에 하나가 나보다 훌륭한 사람 이른바 잘난 사람들을 인정하고 배우기보다 질투하고 깎아내리고 은근히 그들이 잘 안 되길 바란다는 것이다. 겸손이란 추상적이고 현학적 수사로 멀게 느껴질 수 있는 덕목이다. 겸손을 '누구에게나 배우는 마음'으로 변환해서 생각해 보자. 구름 위를 떠다니던 개념이 내 삶 가까이로 착석하는 기분이 들지 않는가? 


열등감 때문에 기괴한 선동자인 유투버나 극우 커뮤니티, 뒤담화에 낭비할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해법.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배우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나보다 무엇이든 하나라도 잘하는 사람은 모두 스승이며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이다. 심지어 부족한 사람이라면 '반면교사' 곧 그들의 허물과 약점, 실패로부터라도 배우고자 한다면 생각이 들 것이다. 그들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실패의 이유가 나라고 예외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다들 뒷담화하는 상사나 임원에게도 배우라. 그들의 인격이 약간의 결함은 있지만 업무능력에서 배울 점은 있다. 그들의 인격을 뒷담화하고 싶다면 앞담화로 직언할 수 있는 나만의 깜냥과 신뢰의 관계성을 맺으라.


열등감은 무서운 취약점이다. 그것은 외부에 대해서만 폭력적, 폭언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열등감의 폭력성은 끔찍하게도 내 인격과 인생을 파괴한다. 세월이 흘러도 인격성숙과 거리가 먼 이유, 그 태반이 치유되지 못하 열등감 때문이다. 열등감은 내가 인격적으로 미숙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외부에 탓을 돌린다. 자신이 더 성숙해져야 하고 교정되변화돼다는 명제를 합리화하며 저항하고 부숴 버린다.


무엇보다 열매가 부실해 진다. 타인을 질시하고 환경을 탓하고 자신을 자책하는데 인생의 에너지를 소진한 나머지 정작 해야할 일을 제대로 못 한다. 가령 공부가 안 되고 직장생활에 적응이 어렵고 심지어 집안일도 구멍이 나 잦은 다툼에 휘둘린다. 내 삶의 에너지를 고갈시켜, 삶의 전반에 카오스를 증폭시키다가, 무기력의 늪에 빠져드는 형국인 것이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 열매 부실하게 세월만 덧없이 흐르게 된다. 결국 나의 인생을 파괴하는 주범은 근본적으로 나 자신인 것이다.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내가 열등감의 폭력성에 사로잡혀 있고 그 취약성에 노출되어 있음을 직면하고 인정해야 한다.   


서두에서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지능 좋은 사람들이 다루기 쉽다고 말한 바 있다. 동어 반복이겠지만 반대로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이른바 지능 좋은 영악한 사람들도 다루기가 어렵다. 그중에 하나가 사람과 상황, 세상에 대해서 (상대적으로나마) 이성적이고 객관적 판단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즉 히틀러 같은 선동자가 등판한다면, 무조건 옳소 추종하는 게 아니라 그의 말이 맞나, 그가 그렇게 유대인을 학살하는 게 인류애와 세계시민 정신에 입각해 정당한가, 윤리적으로 맞는가 검열을 하게 된다. 즉 선동에 동원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지능 좋은 선동가, 그것으로 자기도 기득권에 진입해 탄탄한 토대를 마련하려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두려운 것이다. 섣불리 행동하고 말할 수 없는 눈엣 가시가 생긴 것이다. 그들의 맹목적인 돌진에 브레이크가 생긴 것이다. 


열등감을 배우는 마음으로 호환한 사람은 인간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지고 그렇기에 진심 어린 애정이 생긴다. 누군가를 배우려면 관심, 관찰이 필수인데, 이 지속적인 눈빛은 이내 한 사람에 대해 전에 없는 이해가 생기게 다. 모두에게 욕을 얻어먹는 상사나 임원도 열등감으로 왜곡된 인격때문임이 보이며 이내 그 이면의 고통이 공감다. 자연스럽게 뒷담화가 아니라 나라도 그들을 긍휼히 여기며 도와주자는 모드로 바뀐다. 아부나 처세술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진정 어린 연민과 포용으로 다가오는 부하 직원은 상사나 임원 입장에선 다루기 힘든 사람다. 폭언으로 혼내기도 두렵다. 자신을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사람은 함부로 대하기 어렵거니와 그렇게 했다가는 도리어 죄의식과 자책, 나쁜 평판이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사이코패스라서 별 효과가 없다면 그것도 열매다. 사이코패스와 맞붙으면 나만 피투성이가 될 텐데, 적어도 선의로 대했다면 올 것은 없어도 실점은 없는 인생이니 말이다.


나의 열등감을 직면하며 '배우는 마음'으로 치유를 시작하자. 너무 아름다워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 될 것이다. 



















*홀로코스트(Holocaust):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을 가리킨다. 구약성서에서 희생물을 통째로 태워 버리는 특수한 제사라는 의미가 있는 홀로코스트란 말은 한동안 주로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 섬멸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단어나 대량학살의 일반 명칭으로 사용됐지만, 오늘날엔 유대인 학살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사진, 그림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글과 댓글에 나오는 제 짝꿍은 브런치 작가활동은 전혀 하지 않아요. 비슷한 필명'들'에 헷갈리지 마셔요 :)






**다루기 어려운 사람 매거진 의 예정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예정 목차

*목차는 순번대로 안 하고 조금씩 조정될 예정이에요.

1. 다루기 어려운 사람

2. 폭군 열등감 다루다?

3. 뒷담화 않는 사람 -다루기 어려운 사람 1위

4. 다, 사연이 있어요 - 상사,동료,후배 모두를 인격체로 존중

5. 고양이 목의 방울 달기(feat.사내 변호사)

6. 내 주변의 어금니 아빠 - 착한데? 불의한 사람  

7. 순교정신으로 최선을

8. 잘난 놈을 질투하지 말고 가까이 두라

9. 못난 놈에게도 배우라

10. 투덜이 스머프를 멀리하라

11. 할인쿠폰, 마일리즈 모으지 않는 이유

12. 2:8 법칙과 가십맨들

13. 사내 정치는 OUT

14. 실력은 기본 아이템 - 학교나 지능이 아니라 태도와 EQ다

15. 직장에서 나를 도와주는 팬텀이 생긴다?

16.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리도 말고

17. 거짓 선동자 멀리하라

18. 성실과 정직은 입이 아니라 삶으로

19. 반사이익자들의 먹잇감  

20. 커피타임 양날의 검

21. 선배가 어려워하는 후배

22. 사람, 씹지 말고 소화하기  

23. 새로운 인재상 New Color 족속

24. 가장 강한 사람 - 필요한 게 없는 사람

25. 잔머리는 결국 들통난다

26. 성공자들의 결과를 흉내내지 말고 과정을 배우라

27. 이익(돈)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으라

28. 소탐대실 하지 말라

29. 진정성은 천천히 탄탄히 가는법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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