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년 클레어 Oct 18. 2024

내가 가장 평안할 때(15) 곱지 않은 너

유명인 향한 안티들의 곱지 않은 시선, 더 곱지 않은 그들 내면

최근 우리나라 전체가 큰 상을 받고 기쁨의 탄성을 내지르던 바로 그때, 어디선가 소음들이 비집고 나왔다. 모두가 함께 큰 잔치를 벌여도 부족할 판에 한쪽에서는 희한한 어둠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건설적인 충고나 소신발언을 소중히 여기며 경청하자 주의인 내가 보기에도, 그 발언은 소음에 가까웠다. 혹 알맹이에 문제가 없다 전제한다 해도ㅡ근데 내용이 거짓되고 허무맹랑했다ㅡ 그 표현이 참 저급했다. 속어와 타인을 비아냥거리는 어투, 이른바 소설을 썼다는 문인이라 보기엔 죄송한 얘기지만 다소 천박하기까지 했다.


세상을 보는 시선은 누구나 다를 수 있으니, 누구의 의견도 경청하고 들어보자며, 그 기사를 또 그분을 상세히 조사한 나무O키 글을 찬찬히 읽는데, 비릿함이 밀려들었다. 나중에는 왜 이런 사람이 버젓이 이런 표현을 하는데도 가만히 두는가 의협심마저 올라왔다. 마치 순딩해서, 매일 동네 불량배에게 돈 뺏기고 꿀밤 맞고 들어와, 어깨 쳐져있는 동생을 보는 듯, 이거 그냥 두면 안 되겠네 하는 심정이었다.


오늘 글은 어쩜 그 응집된 감정이 도화선이 되어 급조한 측면도 있다.

                                                                                                                





안에 티가 많은 사람들


안티(anti)란 사전적으로 '어떤 대상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지니거나 또는 그러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 정의에 비춰보건대, 안티란 존재는 때론 사회의 건강성을 위해 필요한 존재가 아니던가. 근데 언제부터인가 '안티'란 어감은 '대단위로 무리를 지어서 특정인을 망신 주고 무례히 공격하는 일단의 무리'란 어감으로 회자되는 듯하다. 이 글은 후자의 체감적 정의에 입각해서 피력하고자 한다.


나야 유명인이 아니니 '무플보단 안티'라는 말이 더 제격인 처지라, 이를 나에게 적용할 바는 아닌 것 같다. 그저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을 저격하는 그들을 멀리서 관망하며 살펴보니, 안티들의 특징은 자기 안 곧 내면에 티(죄와 허물)가 평균보다 (도리어) 더 많은 사람들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정치든 뭐든 특정 편향이 없다. 인류 보편의 도덕률과 상식, 배려와 인격의 측면에서 조망하고 싶을 뿐이다. 여러 정보를 종합하자면, 그녀가 얼마나 자기 실패와 열등감에 짓눌려 있는 사람이였나 알 수 있었다. 글쓰기에 회의를 느껴 이젠 연재 소설이 애매한 활동 정도 하면서,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 자기 모멸감에 시달리면서, 도리어 타인의 결점ㅡ실은 자신이 작위적으로 상정한 결점이지만ㅡ을 물어뜯기에 매달렸다.



안티


우리는 인생 살면서 누구나 이른바 호불호가 생긴다. 그것을 드러내는 이들과 잘 드러내지 않는 이들이 있을 뿐이다. 문제는 그런 호불호를 예와 인격을 갖추지 않고 비아냥거리듯, 타인을 뭉개듯이 표현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미안한 얘기지만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들이란 자기 명분 뒤에 숨었으나 실은 인격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이다. 즉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타인의 눈에 티만 비판하는 형국이랄까. 그런 안티를 주도하는 리더급의 사람들은, 작은 재능과 작은 칭찬에 도취되어, 뭐라도 된 듯 언어의 칼날을 앞장서서 휘두르는 사람들이다. 물론 악과 불의를 처연히 처단하기 위해서 때론 언어는 날이 서야 한다. 그런 고상한 포부가 있다면, 오래 숙고한 철학과 본인도 삶으로 구현한 소신으로, 그 깊이와 넓이를 채우고 무엇보다 인격의 그릇에 그 말을 담고자 애써야 한다.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또 지금도, 이들 안티들이 존재하고 득세하는 이유는, 인간의 시기심과 공멸의 쾌감 때문이다. 즉 나보다 잘 나가는 사람을 일단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 인생이 안 풀리는데 너도 함께 안 풀려야 한다는 마음, 함께 망하자는 마음이 그것이다. 안티들의 언어가 누가 봐도 미숙한 인격을 드러내고 논리의 비약 심지어 허무맹랑한 거짓을 그 둔턱으로 돌진하고 있는데도, 성취자들을 깎아내려 준다는데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얼마나 얄팍하고 어리석은 일인지.


성경의 전도서를 보면, 말은 그 사람이 지혜자인 우매자인지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단서라고 했다.


조심스럽지만, 브런치와 같은 고상한 SNS나 플랫폼에서도 아주 가끔 무례한 댓글들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글쓰기에 집중해야 하는데, 타인의 글을 디스하고 안티 하는데 은근히 에너지를 집중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소신발언, 반론이라는데, 백번 양보해서 그게 진심이 맞다고 치자. 그것이 건설적인 충고 혹은 비판으로 수용되기 원한다면, 제대로 내용 파악을 하고 논리를 갖추고 무엇보다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 물론 상대가 너무 요지부동이라 충격요법이 필요해, 촌철살인의 말이 필요하다면, 그 강한 어조의 문체를 뒷받침해 줄 자기반성적 성찰도 배려 차원에서 동반돼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인간은 자신이 비판하고 지적한 그 흉한 모습을 자신도 동일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자기반성적 성찰 없이 타인만 문제라고 몰고 가면, 그런 사람은 점점 그 실체가 실은 충고가 아니라 빈소리만 요란한 시기심과 자기 파괴에 신음하는 한낱 '안티'임을 드러내, 세월이 흐를수록 주변에 사람이 없어진다.


이 대목에서도, 그들은 스스로를 방어하듯 마치 자신이 몰이해의 세상에 홀로 던져진 핍박받는 순교자로 포장한다. 앞서 말한 큰 문학상을 대놓고 디스 한 여류 작가님은 그 직후 조카와 인연을 끊었고, 그 이전에도 다수의 동료들과 척지고 산지 오래라고 했다. 본인이 등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즈음되면 타인의 그 무엇을 물어뜯고 있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과 내면을 돌보는 '자기 치유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작가와 척지지 마라,
글로 복수하는 사람들이다.
ㅡ 오에 겐자부로 ㅡ


일본인 오에 겐자부로는 노벨문학상 수상식에서 자기 조국 일본을 비판했다 한다. 어렸을 때, 천황을 찬양하지 않는다고 어린 자신을 체벌하며 폭력으로 짓밟은 그때, 어린 오에 겐자부로는 나중에 꼭 폭력때문에 고통하는 소년의 이야기를 글로 쓰리라 다짐했다고 한다.


세상 살면서 드문드문 느낀 희한한 지점이 있다.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실은 정의에 결핍이 있는 사람이다. 자기 국가나 주변, 인생 서사에 정의의 흠결을 맛본 사람, 아주 가끔은 본인이 정의롭지 않은 사람이다. 도덕적이지 않은데 자주 윤리를 논하고, 능력이 부족한데 유능을 포장하고, 성격이 모난 사람이 부드러운 성격을 어필하는 치장을 한다.


작은 재능과 능력이 있는 사람들 중에, 단명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자기감정의 이 지점을 간파하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타인들의 작은 악의 지지에 기대어, 향방 없이 안티의 삶을 지속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안티 본능


허나, 우려스럽게도 우리 내면엔 한 명도 빠짐없이 안티의 본능이 있다. 점잖아 속으로만 궁시렁거리거나 내색을 끝내 잘 못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내 브런치 초기 나름 인기 있는 분이 계셨다. 내 초기 글을 보면 알겠지만 내 짝꿍을 천재로 애칭하며 ㅡ 강조드리지만 제 짝꿍은 브런치 작가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비슷한 필명에 헷갈리지 마셔요ㅡ 막 글을 쓰던 때였다. 당시 짝꿍이 우울증이 여전했고, 조심스럽지만 연애 초기까지도 자살충동을 되내던 남자였다. 머리가 굉장히 좋은데 오랜 우울증 약, 수면제로 건망증을 힘들어해 다시 머리가 좋아질 것이라는 응원의 의미로 '천재'로 애칭 한 것이었다. 여자로서 내 고뇌와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 지금은 정반대로 100살까지 살고 싶다면 서행운전하며 건강한 내면을 회복했다. ([유머 2] 사십춘기 커플의 대화)


그즈음, 한 분이 천재를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라는 논조의 글을 썼는데, 요지는 천재들이 나중에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다는 그런 류의 내용이었다. 그 당시 내 구독자는 몇 십 명도 안 됐고 그분은 상당한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분은 초기부터 내 글에 라이킷을 자주 주었던 분이었다. 그 글 전에도 왠지 나를 겨냥하는 듯한 어떤 느낌은 있었으나 내가 예민했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이 글을 기점으로 내 느낌이 맞았음을 알았다. 그때 정말 속이 너무 상했고 겉으로 내색을 다 안 했지만 화가 정말 났다. 타인의 고통의 서사를 제대로 알고 그러는 건지, 스스로 좋은 사람임을 자주 어필하는 모습에 도리어 위선감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분은 나름 자기 입지를 다져가는 것 같았으나 나에겐 호보다는 '불'의 느낌이 따라다녔다.


일전에 언급한 로버트 그린의 <인간 본성의 법칙>에 나오듯 아무리 꾸며도 비집고 나오는 인간의 진짜 민낯을 본 듯 마음이 니글거렸다. 나는 조용히 그분을 차단했다. 내 짝꿍 때문에 시작한 브런치를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다른 분들은 - 나머지 분들은 그 글이 나를 겨냥한 줄도 모르는 듯했다. 내가 구독자가 몇 명 안돼 글 존재도 모를 시기였다- 댓글 소통으로 천재 필요 없다, 성실한 우리가 최고라는 식의 자화자찬을 쓰기도 했다.


동시에, 나름 괜찮다는 사람들도 본능적으로 시기심을 숨길 순 없구나, 씁쓸함이 피어오르다가 이내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았다. 그분을 차단만 하고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분은 그 후로 주기적으로 비슷한 행태를 반복했고 어느 순간 나도 몇 번 우회적 소신글로서, 그분 스스로 자기 성찰을 병행하며 세상을 보도록 조언해 드리긴 했다. 다행히 요즘은 타인 디스를 덜 하시고 훈훈하고 풋풋한 이야기를 주로 쓰셔서, 그나마 성숙한 분이란 판단에, 초반에 비호감은 다소 누그러들었다. 허나 그 찰나의 순간 비집고 나온 말의 부족함은 그 비호감을 아예 없애기엔 아직은 역부족인 듯하다.


반대로 내가, 특정 누군가를 지칭한 게 아닌데 공교롭게 내용이나 단어가 누군가의 글속 최근 내용과 겹쳐져 미안했던 적도 있긴 하다. 그럴 때는, 친한 작가님이면 브런치에 찾아가 내가 그런 의도가 아님을 우회적으로 피력하며 라이킷 선물을 한 아름 안겨주고 온 적도 있다.


앞서 오에 겐자부로의 '작가에게 척지지 마라'는 명언을 인용했지만 그보단 '자기 양심의 소리에 척지지 마라'로 응용해서 우리네 삶에 적용했으면 좋겠다. 우리도 누구나 안티의 본능이 있음을 알고 스스로 점검하고, 때론 그것이 실수였으면 만회하고, 의도적이었다면 자신의 의도 이면에 본능적 악함은 없었는지 돌아보자. 우리 모두는 늘 다듬어져 가야 하는 인생이란 미완공 건물의 소유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진실과 양심에 척지지 마라
자기 인격의 퇴락으로 보응을 받을 것이다
성찰하라, 타인을 판단하듯
매일 자신을 성찰하라















본 큐티는 제가 한 번에 쑥 썼는데, 사실상 거이 퇴고가 없는 상태이나, 이때의 뉘앙스를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거이 편집 않고 그대로 공유드립니다. 직장일이 폭주해 정신없던 하루여서 좀 급하게 짧게 썼으나 어쩜 그렇기에 좀 더 직관적이고 솔직했던 것도 같습니다.




[생생큐티] 2024년 10월 17일(목) 지혜와 우매(전도서 10장)

1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느니라

2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

3 우매한 자는 길을 갈 때에도 지혜가 부족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가 우매함을 말하느니라

4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손함이 큰 허물을 용서받게 하느니라

(전도서 10:1-4)     



그 누군가를 지혜롭다 할 때, 일상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도 종종 우매할 때도 있다고 말입니다. 완벽한 지혜란 신의 영역이기에 이런 추정과 판단은 맞습니다. 이 대목에서, 한 인간 안에 지혜와 우매란 어떤 형식으로 존재하는가란 의문이 듭니다. 파렛트에 실려진 물감처럼 뒤죽박죽 섞여있을지, 서랍장처럼 칸으로 구획 되어져 함께이나 분류되어 있을지, 아님 소풍날 보물 찾기처럼 지혜와 우매가 여기저기 흩어져 산재해 있는 것인지, 그 뒤섞여 있을 전혀 다른 두 가지 속성이 궁금해집니다.      


이에 대해서, 2절에서는 지혜자의 마음과 우매자의 마음은 섞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신기한 것은 지혜와 우매를 섞어 놓지 않고 있다는 대목입니다. 지혜‘자’라고 하는 것으로 보면 한 사람이란 인격체는 지혜이면 지혜지 결코 우매와 뒤섞일 수 없는 듯 보입니다. 그것은 우매자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서두에 전제를 깔아놓은 지혜와 우매의 혼재는 에라일까요? 이 말은 지혜자와 우매자가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있다기보다 같은 사람이 어느 날은 지혜자로, 어느 날은 우매자처럼 전혀 다르게도 살 수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언급한 지혜자와 우매자란 이상적인 설정이랄 수도 있습니다. 개념으로 존재하고 실제로는 불완전한 존재로서, 기간으로서 경험이 가능한 그것 말입니다.      


1절에서는, 이 부문에 대해서 접근성 좋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적은 우매는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개인 안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고 개별 주체 간에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우매'를 '죽은 파리'에, '지혜'를 '향기름'에 비유해서 표현한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죽은 파리와 향기름을 섞어 놓으면, 각자의 공간에서 분리되어 존재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향기름이 죽은 파리를 향기롭게 빛나게 하지는 못 하나 죽은 파리는 도리어 향기름을 악취 나게 합니다. 파리가 '죽어있기' 때문에 생겨난 일방성입니다. 말이 조금 부족한 것은 갱생의 여지가 있으나 죽어버릴 지경의 말은 주워담기 어려운 수위에 이를 수 있다는, 그 지점이 연상됩니다.      


이 대목에서, 그렇다면 지혜를 추구하는 자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지혜를 얻고 다지는 것 이상으로, 여기저기 존재하는 세상의 무매, 자기 우매를 분별하고 필터링하는 작업임을 생각합니다. 내 안에 있는 우매를 발견하고 핀셋으로 정밀하게 끄집어 제거하는 일입니다. 우매를 내버려 두고 지혜의 탑을 쌓아 올리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 지혜 쌓기가 일순간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근본이다’는 성경 말씀은 정밀하게 우리 내면을 타격합니다. 인간 최고의 우매는 하나님(신)을 모르는 무지, 제대로 알려하지 않는 무지이고, 여기서부터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무관심은 이내 무시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을 무시하는 마음은 항상 비례적으로 인간을 무시하는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이건 진리입니다. 


즉 우리 안에는 지혜와 우매가 혼재하는데, 우매가 득세하면 그는 혼합된 자아가 아니라 우매한 자로 하루를 살아가게 됩니다. 우매와 지혜는 별개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멸시하는 것은 분리되어 있어 그럴듯한 중간지대, 회색지대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애매한 중간지대라 안심하는 것은 그저 인간의 근시안적이고 얄팍한 자기 위로에 불과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 뭔가 한 대 맞은 기분입니다. 어제 큐티를 밤까지 미뤄두는 가운데 공교롭게 그날 어머니가 하루종일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일이 오버랩되면서 큰 찔림이 엄습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바쁠때는) 거르거나 미루는 일은 심상히 여기면서 육신의 몇 끼 식사를 굶는 일, 그것도 연약한 노령의 어머니가 굶는 일에 대해서 위기감을 느끼는, 이중의 어긋난 잣대를 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깨어있지 못해 우매한 하루를 보냈는가 자책감이 들었고 바로 회개 기도를 드리고 큐티를 급하게나마 하고 잤습니다.  그러자 공교롭게도 오늘 어머니는 언제 그랬냤는듯 식사를 너무도 정상적으로 잘 하셨습니다.


제가 우매와 지혜가 혼재 가능하다는 안일한 생각을 버리고, 두렵고 떨림으로 지혜를 찾고 찾는 자, 진정 하나님을 날마다 항상 경외하므로 지혜에 온전히 거하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 짝꿍은 브런치 작가활동은 전혀 하지 않아요. 비슷한 필명'들'에 헷갈리지 마셔요 :)

*사진, 그림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