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생활을 마무리하는 시점인지라 바쁜 일이 많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을 정리해서 몇몇 사람들에게 파일을 보내주려고 한다. 홈스테드 생활을 찍은 것이 많아서 영상으로도 만드려고 생각 중이다. 네이버 포토뷰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사진으로 비디오를 제작하는 것이 의외로 간단하다. 멋지고 아름답게는 못하겠고, 심플하게 170여 장의 사진으로 10분 정도 되는 동영상을 만들고 있다.
한 여름인데도 사과가 벌써부터 익어가기 시작한다. 요 며칠 바람이 불어와 떨어지는 사과가 너무 많다. 그걸 그대로 버리기가 아까워서 사과효소 만드는 비법까지 스티븐에게 전수를 했다. 여기는 발효음식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도 많고, 채식주의자도 많다. 가능하면 내가 아는 것들을 나누고 싶다. 차나 음료로 혹은 요리할 때 설탕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다용도 발효액을 전파 중이다.
한 여름의 시골에서 제일 흔한 것은 역시 야채다. 그래서 틈이 날 때마다 겉절이를 담가서 반찬으로 먹었다. 얼마 전에 캐서린이 언제 시간이 되면 홈스테드 코워커들을 대상으로 김치교실을 한번 열어 달라고 요청을 한 적이 있다. 그러겠노라 답했는데 그 사이에 한국 배추가 수확되지 않아 지나가나 했다.
“Ray~ 이번 주에 한국 배추를 수확했어요.”
“앨리~~ 그래요? 양은 좀 되나요?”
“네. 꽤 많이 수확했어요.”
“그러면 목요일 저녁에 김치 만들기를 한번 배워볼까요?”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갑자기 마음이 바빠진다. 이번 기회에 오이소박이도 제대로 담가 봐야겠다. 나는 무얼 시작하면 왜 손이 커지는지... 왜 그런지 모르겠다. 일단 가든 담당인 조나단에게 부탁을 해서 배추, 양파, 마늘, 당근, 파, 오이를 넉넉히 챙겼다. 텃밭에 가서 부추도 직접 뜯어왔다.
수요일 저녁부터 배추 절이기를 시작했다. 배추 알이 작아서 쪼갤 필요는 없지만, 양이 상당하다. 천일염이 없어서 가는 가는소금을 구했다. 이집 저집 다 물어봤는데 다 없단다. 결국 윌에게 부탁해서시내마트까지 가서 사 왔다. 한국에서는 배추를 제대로 절구어 본 적이 없는데, 여기서는 내가 김치 전문가이다. 인터넷을 뒤져서 영어 레시피까지 찾아 프린트를 했다.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하련다. 한국에서 김장을 하고 그 마무리는 보쌈이지 않나? 커뮤니티센터 냉장고를 뒤져서 돼지고기도 챙겼다.
그런데... 큰일이다. 시일을 다투는 일이 이메일로 도착했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에 정말 온 힘을 다해 학회에 기고한 연구 논문의 피드백이 이제야 온 것이다. 결과는 수정 후 게재이다. 심사위원들의 정성 어린 피드백이 나의 열정을 쏟구치게 한다. 아이들 키우며, 직장 생활하며, 박사과정 공부를 하고 있는 나, 생애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곤두선다. 꼭 이럴 때 겹친다니까 ㅠ.ㅠ 내일은 김치 수업도 해야 하고, 짐도 싸야 하는데... 언제 수정하냐고!!! 막막한 마음이 들지만, 그래도 배낭여행 출발하기 전에 온 것이 어디냐며 마음을 다 잡아본다. 소설만 읽고 농사만 짓다가 갑자기 논문을 보려니 눈 앞이 깜깜하다.
목요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김치가 잘 잘 절구어지고 있는지 확인했다. 가는소금으로 했더니 간이 제대로 안 베인다. 위아래를 바꾸어주고, 배추들한테 내 마음 한번 보내 본다. 김치는 절이기만 잘해도 절반은 성공이라고 했는데... 걱정이 한가득이다. 아침 먹다가 윌에게 내 상황을 얘기했더니 감사하게도 오늘 작업을 빼주겠단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식사할 때나, 김치 재료 확인하러 갈 때나 주방에 올라갔다. 다행히 이번 김치교실의 도우미로 우리 집 닉이 나섰다. 배추도 씻어주고 야채를 다듬어 준단다. 게다가 두 아이들도 한국 요리를 미국 사람들한테 알려주는 이벤트를 한다니 신이 났다. 바쁜 엄마를 찾지도 않고, 도와줄 것이 없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갑자기 오후부터 비가 오기 시작한다. 어젯밤에 운동화를 빨아 놨는데 날씨가 이러면 언제 마르려나... 시골에서야 진흙 묻은 운동화, 지저분한 옷이 별 상관이 없지만, 뉴욕에 가야 하니 괜히 신경이 쓰인다. 이른 저녁을 먹고 커뮤니티센터 주방으로 향한다. 나는 김치교실 수업을 준비하고, 아이들은 소 젓 짜기를 하러 갔다. 마지막이니 특별히 한 번 더 소젖을 짜겠다고 한껏 들떠있다. 마지막이라는 것에 모든 것이 다 의미 있게 다가오나 보다. 엄마가 없이도 둘이서 씩씩하게 다니니 보기에도 좋다. 진작에 좀 그럴 것이지~ 끝나려니 적응되었나 보다.
그렇게 해서 고대하던 김치교실이 시작되었다. 스탭으로는 앨리, 그리고 봉사자들 대부분이 참여했다. 모두들 진지하게 나의 설명을 듣고, 무우 채를 썰고 고춧가루 양념을 버무렸다. 고춧가루가 부족해서 고추장까지 사용하게 됐다. 엄마를 따라온 아이작까지 합류해서 손에 얼굴에 고춧가루 양념을 묻히고 난리가 났다.
“Ray~ 지금까지 김치를 먹기는 했는데 제대로 된 것을 못 먹었던 것 같아요. Ray가 만들어준 김치가 가장 맛있었어요. 방법도 달랐고요.”
“정말이요~ 닉? 사실... 나도 초보예요.”
“Ray는 언제부터 김치를 만들기 시작했나요?”
“엄마가 만들어주셔서 김치를 만들 일이 사실 없었어요. 아이 낳고 최근에 겉절이 정도는 해 먹었지만요. 저도 이렇게까지 많은 양의 김치를 담가 본적은 처음이에요.”
“저는 정말 김치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아요.”
“미국 사람들이 김치에 관심이 많다는 게 정말 신기해요! 제가 이렇게 요리교실을 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니까요. 저희 가족들도 다 놀랄 거예요.”
김치를 통에 넣고 뒷정리를 하고, 우리가 먹을 겉절이를 챙겼다. 채식주의자인 스티븐을 위해 두부까지 준비해봤다. 김치와 보쌈, 두부, 와인으로 저녁 간식을 배부르게 먹었다. 지난번 내 생일에 조안이 선물로 준 와인을 남긴 보람이 있다. 재료가 유기농이라서 그런지, 물이 좋은 시골이라서 그런지 김치 맛도 상당히 좋다. 음하하하.. 오늘 김치교실은 대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