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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 May 10. 2020

따로 또 같이, 행복하게 '사는 자리'

마음 통하는 좋은 이웃과 살고 싶다

  두 아이를 키우며 워킹맘으로 고군분투하던 삼십대 때 천국이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외국에 있는 어떤 공동체에서는 아이를 혼자 키우지 않고, 공동체에서 함께 키워준대. 재산이 없어도 되고, 집 걱정 할 필요가 없어.” 그 말이 사실일까 출퇴근 전철안에서 어느 방문객의 글을 열독했다. 그런 삶을 간절히 원해서 육아휴직을 받아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 있는 공동체에서 3개월 동안 체험을 했다. 더불어 살아가면서 ‘연대’와 ‘돌봄’을 실현하는 삶이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동작구에서 삼십년을 넘게 살았다. 고등학교만 한강대교를 건너다니고 초중고대학 모두를 동작구에서 다녔다.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곳이지만, 동네에 아는 사람 하나 없었다. 낮에는 직장에서 대부분을 보내고, 주말에는 아이들 챙기며 집안 일 하느라 정신없다. 그저 반복된 일상 속에 익명성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어린 시절 한 동네에서 이 골목 저 골목으로 이사도 많이 다녔다. 다행히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는 둘째를 임신했을 때부터 14년째 전세로 살고 있다. 내가 언제까지 이 집에서 살 수 있을까?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내 품을 떠날 때가 멀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내 삶을 풍성하게 보낼까 고민되는 시기이다. 마침 한국사회에 마을, 공동체, 협동조합이 인기를 끌었다. 그 중 내 마음을 잡아끄는 것은 단연 공동체 주택이었다. 아파트에 들어갈 돈은 없고, 빌라는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다. 집을 투자의 대상이 아니라, 삶을 풍성하게 해 주는 공간으로 바라보고 싶다. 간장이 떨어졌을 때 한 숟가락 빌리고, 맛난 반찬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었다. 여섯 집이 ‘마음 통하는 좋은 이웃’을 만나고 싶다는데 마음을 모았다. 책을 읽고 회의만 했더니 머리가 아팠다. 그래서 공동체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각자의 공간에서 느슨한 관계를 맺기도 하고, 삶의 모든 부분을 함께 공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돈이 많지 않아도 인품이 완벽하지 않아도 가능할 수 있겠다 싶었다.


  모임이 지속되니 각자의 개성이 단점으로 다가왔다. 40명 정도 다니는 작은 교회에서 이십년간 부대끼며 서로 잘 안다고 착각했나보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공동의 과업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부여하는 의미와 다른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사람들이랑 어떻게 같이 집을 짓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회의감이 밀려왔다. 주변에서 왜 그리 힘든 길을 가냐고 만류했다.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 내가 제일 싫었던 것이 형제가 많다는 것이었다. 9남매 중의 막내라는 타이틀이 그렇게도 싫었다. 편히 앉을 자리 없이 북적이는 명절이라는 날이 참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작은 교회를 다니고, 학생회나 동아리 활동에 열광하고, 이스라엘 키부츠에서 남편을 만나고,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그리고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내가 꿈꾸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에 매력이 느껴졌다.


  공동체 주택에 거는 이상과 나의 현재는 어떠한가?


  사실 나는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고, 무언가 정해지지 않았을 때 불편함을 크게 느끼는 사람이다. 인생 공부를 통해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성숙한 어른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 커졌다. 그로 인해 나와 다른 성향의 사람들과 관계할 때 내면에 폭풍우가 자주 몰아친다. 몇 년 전에는 새해 목표를 ‘회색주의자가 되자’로 세웠다. 그런데도 사람 쉽게 안 변한다고, 내 안의 갈등은 여전했다. 너무 이상만 쫒아 가고 있나? 조화로운 삶이 가능할까? 혹시 내 발에 족쇄를 채우는 것이 아닐까?


  나를 되돌아보았다. 관계 안에서 연결되는 것을 진정 원하는지 다시 되물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잘난 척하는 내 민낯을 만났다. 입으로는 평화를 사랑하고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다고 하면서도 막상 행동은 그러하지 못했다. ‘내가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이 과정이 나에게 꼭 필요한가?’ 고민 끝에 이상과 현실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공동체 주택을 짓는 것은 ‘똥 밟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이후 공동체주택 모임이 차근차근 추진되었다. ‘사는 자리’라는 이름을 짓고, 협동조합 총회를 열었다. 급여 생활을 오랫동안 한 사람이 대표가 되어야 대출에 유리하다고 해서 협동조합 이사장이 되었다. ‘가치가 있는 일에 한 몫 거들 수 있다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리라, 겸손한 사람이 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여섯 가구가 집을 지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돈에 대한 불안, 관계에 대한 불안을 넘어섰으면 좋겠다. 두 아이가 자기 삶을 찾아 떠나가도 좋은 이웃 덕분에 외롭지 않게 살아가고 싶다. 앞으로 땅을 찾고, 대출을 하고, 집을 짓는 무수한 과정이 남아있다. 함께 조율하고 서로의 차이를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안과 밖으로 요동치는 날들이 오겠지!


  두려우면서도, 설레이는 나의 도전,

   ‘그래! 이제 시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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