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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May 23. 2024

동료였던 남편과 첫 데이트를 약속하다.

2018년 10월, 그와의 첫 약속

[2018년 10월]

☑ 남편 한 줄 정보: 김현우. L선배의 짝사랑 상대. 열렬한 그녀의 구애에도 꿈쩍 않는 강인함(?)의 소유자.


나의 남편은 사실 과거 있는(?) 남자다. 우리가 함께 일했던 팀에 있던 L작가의 짝사랑 상대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슴앓이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나는 그 모든 경과를 듣는 대나무 숲이었다. 지금도 가끔 그때를 떠올리면 ‘남편이 그렇게 매력적인가?’라는 의심이 가시지 않는다. 다시 한번 옆에 있는 그의 매력을 찾아보기 위해 훑어본다. 흠. 사와디캅?...


아, 그전에 나는 친구의 친구를 사랑하는(?) 그런 드라마에서 볼 법한 일은 하지 않았다고 미리 말해두고 싶다. 그렇게 현우 감독이 치명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았을뿐더러 나에게도 나의 연애 사정이 따로 있었기 때문.


여하튼 내가 현우 감독을 태국인으로 생각하든 말든, L선배에게는 그저 왕자님 그 자체였다. 그녀는 나와 출장을 다녀온 후로 부쩍 내게 말을 많이 거는 현우 감독을 보고 불안해진 탓인지, 최근 현우 감독이 오랫동안 만난 연인과 헤어졌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인지 어쨌든 칼을 빼서 들었다. 나는 부디 고백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빨리 해결이 되어 내 귀가 쉴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3, 2, 1 고백 발사! 를 할 때까지 L선배는 백번이고 천 번이고 내게 고백 시뮬레이션을 했다. 그런 노력 끝에도 결과는 처참했다. 소문을 들어 보아하니 그가 전 연인과 정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음에도, 이미 좋아하는 다른 사람이 있다고 했단다. 아. 왜 하필. 나는 앞으로 얼마나 L선배의 시련을 들어줘야 하는가. 그 뒤로도 얼마 간 L선배는 현우 감독을 놓지 못했지만, 현우 감독은 미동도 없었다. 그날 이후 L선배 근처로는 얼씬도 안 했으니.


속없이 헤헤거리고 여기저기 촐싹거리며 떠들어대던 그가 L선배의 진심 어린 고백을 거절했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수많은 고백 연습을 나와 함께 했기에, L선배가 얼마나 진지하게 그 전투에 임했을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인간. 덕분에 나는 그 후로 며칠을 더 새벽 술자리에서까지 현우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얼마 있지 않으면 이마저도 끝날 것이라는 것에 참고 또 참아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달이 흘렀다. L선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른 이를 마음에 품었고, 현우 감독과 나는 전보단 조금 친해졌다. 그리고 다시 우리 팀이 해외출장을 갈 일이 생겼다. 개인적으로 너무나도 가보고 싶었던 나라였기에 나는 내심 기대했지만, 빠듯한 방송국의 형편상 작가들은 출장 명단에서 빠지게 되었다. 맙소사. 방송국이 벌어들이는 그 수많은 돈은 대체 어디로 가는지. 왜 맨날 제작비는 펑크가 나고 모자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기념품이라도 얻고자 출장명단을 보았다. 나이 지긋하신 A피디. 음 내가 부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이어 까칠한 B카메라 감독. 말도 걸기 싫다. 그리고 대망의(?) 현우 감독이 있었다. 그래, 이런 부탁쯤이야 들어주겠지. 그래도 친군(?)데.


그들이 떠난 지 3일째 되던 날. 나는 현우 감독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수고했다는 목적 다분한 인사말과 함께 혹시 유명한 기념품 인형 하나 사다 줄 수 있겠냐고 넌지시. 그는 흔쾌히 알겠다더니 몇 장의 사진까지 보내며 내가 직접 고를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다정함은 무엇이지? 난데없는 그의 배려에 신난 나는 마음껏 기념품을 골랐고, 현우 감독은 밥이나 사라는 간단한 말만 남겼다.


출장팀이 돌아오고, 한국에서의 촬영 진행으로 바쁜 와중에 현우 감독이 나를 슬며시 부른다. 그리고 가방에서 기념품 인형을 꺼내주는 게 아닌가? 아니. 왜 지금! 보는 눈이 수 백개다. L선배도 있다고! 다급해진 나는 마치 마약 밀거래를 하듯 그의 가방에서 인형을 끄집어내 후딱 내 가방 속으로 넣었다. 그리고 고맙다는 짧은 인사와 함께 다시 일터로 복귀했다. 다행히 L선배의 마음은 이미 콩밭에서 떠난 지 오래라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바쁜 하루가 끝나고, 모두가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퇴근을 하려던 차.

현우 감독이 내게 다가온다. “밥 언제 먹어?”

아니, 밥 먹자는 게 진심이었나? 밥 한번 먹자는 오천만 한국인들이 늘 하는 인사가 아니었던가? 나름 계좌이체로 깔끔히 계산을 마치려 했는데, 이렇게나 밥에 진심일 줄은 몰랐다. 당황한 나는 한가할 때 보자는 대답과 함께 지친 몸을 끌고 퇴근했다. 하지만 현우 감독은 집요했다. 퇴근하는 나의 뒤통수에 대고 밥 먹자는 메시지를 다시 한번 보냈다.


지금도 좋아하는 반찬이 있다면 밥 세 그릇은 거뜬한 현우 감독을 보면 그때의 그 약속이 정말 맛있는 한 끼를 먹고 싶어서 그랬나 싶기도 하다. 본인은 죽어도 나를 밖에서 만나고 싶어서 그랬다는데, 그의 식성을 보아하니 그 이유뿐만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 만약 내가 그날 현우 감독에게 게장을 샀더라면, 우린 두 사람이 밥 다섯 공기를 먹고 볼록해진 배를 매만지며 헤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결혼 후 1년 만에 아주 인심 좋은 부부처럼 살이 쪄버렸지만, 나는 마치 세뇌된 것처럼 그가 열심히(?) 밥 먹는 모습이 아직도 보기 좋다. 부디 쑥쑥 먹고 잘 자라길.


☑ 남편의 첫 약속: 그는 밥에 진심이다. 살면서 본 가장 잘 먹는 진정한 푸드 파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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