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자랐습니다.
접수처에 걸린 달력을 보고 손가락을 꼽아본다. 벌써 입원한 지 열흘이 지났으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는 이 주가 넘었다. 점심 식사 후 간호사가 가져온 약을 꿀꺽 삼킨다. 그리고 소리 내 입을 벌려 약을 삼켰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마지막 확인까지 마친 후에야 자리에 누울 수 있다. 흰 벽과 천장.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계절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알 수 없는 이곳. 나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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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전자회사의 영업사원이었던 나는 어머니의 유일한 자랑이었다. 업무 때문에 술을 멀리할 수 없는 탓에 거의 일주일 내내 취한 채로 집에 들어오곤 했지만, 어머니는 항상 내게 웃으며 꿀물을 타서 내주고, 나의 출근 시간에 맞춰 매일 새롭게 밥을 지었다. 때문에 나는 지난밤 아무리 늦게 들어오고, 술을 많이 마셨어도 아침 일찍 일어나 어머니와 함께 식사를 했다. 어머니가 손으로 쭉쭉 찢어주는 김치가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나는 내가 7살이 되던 해부터 단둘이 살기 시작했다. 아버지란 사람은 내가 태어나기 오래전부터 일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한량이었다. 술을 입에 달고 살며 너나 할 것 없이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욕지거리를 하도 많이 해대서, 나는 어려서부터 동네 어른들로부터 눈칫밥을 먹고살았다. 그렇게 내가 아버지를 본 6년 동안 아버지는 늘 방바닥에 눌러 붙어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대신해 남의 밭일을 도와주고 받아온 것들로 나를 먹여 키웠고, 각종 허드렛일을 하며 받은 품삯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가 힘들게 벌어 온 돈으로 매일 술을 사 마시고 쉴 새 없이 문제를 일으켜 이틀에 한 번꼴로 어머니를 경찰서로 불러댔다. 그리고 그는 유독 술을 많이 마신 날이면 어김없이 어머니와 나에게 손찌검을 해댔다. 그렇게 어머니는 매일을 멍투성이의 얼굴을 하고서도 꼬박 10년을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찬바람이 불던 늦은 밤이었다. 여느 때처럼 술 취한 아버지의 주먹을 피해 옆집 할머니 집에 숨어있었다. 대게 아버지가 잠이 들고난 뒤 어머니가 나를 데리러 오는데, 그날은 꽤 오랫동안 기다려도 어머니가 오지 않았다. 걱정이 된 나는 잠든 할머니 곁을 몰래 지나 집으로 향했다. 대문을 열고 좁디좁은 부엌을 지나서 도착한 방문 앞. 숨을 죽이고 문에다 귀를 갖다 댔다.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최대한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그 순간 나는 아버지 곁에 칼을 들고 앉아 있는 어머니와 눈이 마주쳐 뒤로 나자빠졌다. 쨍그랑. 하필이면 내가 넘어진 곳은 설거짓거리를 담아놓은 대야 위였다. 놀란 나를 보고 어머니는 ‘쉬’ 소리를 내며 입가에 손가락을 올렸다. 어머니는 잠시 숨 쉬는 것도 멈추고 아버지를 살폈다. 제법 큰 소리가 났음에도 아버지는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잠에서 깰 줄을 몰랐다. 어머니는 손에 쥐고 있던 과도를 아버지 머리맡에 내려놓고, 조용히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얼마 동안이나 말없이 아버지를 내려다보다가 몇 가지 옷가지와 꾸깃한 통장을 챙겨 급히 내 손을 잡고 집을 나왔다. 나는 어머니의 거친 호흡에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제야 보았다. 어머니의 오른쪽 이마가 손바닥만 한 크기로 찢어져 있는 것을. 얼마나 오랫동안 피를 흘리며 아버지 곁에 앉아 있던 것일까. 나는 어머니 이마에 엉겨 붙은 피와 휴지를 보고 있자 속이 울렁거렸다.
그날 밤, 우리는 이모가 살고 있는 먼 지역까지 버스를 타고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아버지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와 살던 때보다 더 좁은 단칸방에 다시 터전을 잡았고,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전보다 더 열심히 일거리를 찾아 헤맸다. 집에 혼자 남은 나는 방 안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신문지를 찢는 등의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지겨울 때쯤엔 방바닥 한가운데에 벌러덩 누워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이 작은 방안에 내가 갇혀있는 것인지, 남아있는 것인지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