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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품하는 고양이 Jun 24. 2020

오디오를 시작하다

나의 오디오 이야기 ep. 0

중학생 때였다. 어쩌다가 단체로 1박 2일 체험학습을 갈 일이 있었는데, 같은 학교 친구랑 버스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목적지까지 족히 세 시간은 걸려서 창가에 기대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가 주적주적 내리는 날이었던 데다가 원래 차만 타면 알아서 잠이 오는 희한한 체질이라 아마도 잠이 들려던 참이었던 것 같다.


옆에 탄 친구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고 항상 주변을 부산스럽게 하는 것을 좋아했다. 둘이 영화도 자주 보러 다녔는데, 나랑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 취향이 비슷하다 보니 서로 이것저것 추천도 해주는 사이였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앨범이 나왔다며 가는 길에 같이 듣자고 했다. 나는 이어폰 한쪽을 넘겨받아서 낀 채로 다시 창가에 기대었다. 그때 들은 앨범이 마룬 파이브의 Overexposed이다.


이미 마룬 파이브가 한국에서 한창 유명세를 떨칠 때라, 처음에는 별로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뭔가 소리가 달랐다. 이미 들었던 노래를 다시 들을 때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이어폰을 분명히 한쪽만 꼈는데, 평소에 양쪽 모두 끼고 들을 때보다 소리가 훨씬 더 힘차고 풍부했다. 그날 버스에서 들은 Lucky strike와 One more night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다음 날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이어폰을 사러 갔다. 혜화동에 있는 ‘이어폰샵’이라는 가게인데, 만원 이하부터 수백만원대까지 굉장히 다양한 제품을 취급하고 대부분은 현장에서 들어볼 수 있게 시제품이 준비되어있는 청음샵이다. 친구가 자기도 그 이어폰을 거기에서 샀다고 했다.


그렇게 처음 구매한 이어폰이 지금은 단종된 Ultimate Ears의 UE600이다. 버스에서 들었던 이어폰과 같은 브랜드의 조금 낮은 라인업인데, 전날의 기분을 간직하고자 같은 회사 제품을 선택했던 것 같다.

Ultimate ears사의 커스텀 이어폰

며칠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음악을 들었다. 소리가 너무 좋아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 이후로 그렇게까지 음악을 들으면서 감동을 받은 적이 없다. 원래 음악을 들으면서 공부를 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이어폰을 들으면서는 도저히 글씨가 읽히지 않아서 공부도 못할 정도였다.


내 오디오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아마 많은 이들하고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 후로도 틈날 때마다 청음샵을 방문해서 새로운 이어폰/헤드폰을 들어보았다. 개중에는 정말 마음에 들어서 이것을 사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활활 불타오르게 만드는 것들도 많았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사서 모은 이어폰/헤드폰이 열댓 종류가 넘는다.


원래 오디오는 처음에 시작할 때가 가장 행복한 법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귀는 까다로워지고 지갑은 얇아진다. 내가 원하는 바를 100%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스피커는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처음에는 한없이 좋은 것만 같았던 소리도 나중에는 그 감흥이 덜해진다.


괜히 돈 잡아먹는 3대 취미가 자동차, 오디오, 카메라라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니다. 번들 이어폰만 듣다가 가슴이 벅차오르게 만드는 이어폰을 사는 것은 10만 원으로도 충분하지만, 거기에 적응된 이후로 같은 정도의 감흥을 느끼려면 적어도 두세 배는 돈을 더 들일 생각을 해야 한다. 흔히들 ‘기변증’이라고도 하는 이 악마의 순환고리는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는 이상은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운이 좋았다. 삼촌 역시 벽 한쪽을 CD로 메워 놓으실 만큼 진성 오디오파일이셔서, 학생 신분으로는 벅찬 헤드폰과 스피커를 선물로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자기 체급에 맞지 않는 헤드폰을 쓰면, 중간의 불필요한 지출을 하지 않고 바로 지름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요즘은 그래도 새로운 기기를 장만하는 것을 조금 자제하고 있다지만, 오디오와 나의 애증 스토리는 현재 진행형이다. 앞으로는 근 몇 년 동안 겪은 에피소드들과, 오디오의 이론과 실전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여러 편에 걸쳐서 연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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