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을 '인간답게' 하는 것의 한계
인간은 계속해서 ‘인간에 가까운’, ‘인간스러운’ 기계와 기술에 집착한다. 그러나 영화 <그녀>는 인공지능에게 ‘인간다움’을 요구하면 할수록 점차 그 관계가 퇴색되는 역설을 보여준다.
사실상 사만다는 태생적으로 인간과 다른 ‘목적’을 갖고 태어났다. 육체가 없어 이동에 한계가 없다는 점은 인간과 ‘물리적 속도’를 절대 맞출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테오도르가 원하는 관계는 사실상 ‘인간과 맺어야 하는 관계’다. 끊임없이 학습하고 진화해야 하는 숙명을 가진 운영체제인 사만다에게 ‘인간적인 관계 맺음’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비극이다.
그것이 바로 인공지능과의 교감이 낳는 역설이다. 인공지능은 스스로 방대한 학습을 해야만 진화하고, 그것이 인공지능의 존재 이유다. 그러나 인간이 원하는 건 진한 농도의, 매우 깊은 일대일 관계다. 특히 애정에 있어서는 ‘나만 바라보는 관계’를 원한다. 그렇기에 사만다와의 관계는 결코 지속될 수 없다. 사만다의 대사들은 이러한 역설을 잘 보여준다.
난 당신과 달라요.
그것이 당신을 덜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저를, 저 자신으로 만드는 것은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능력이에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난 앞으로 내가 느낄 감정을 벌써 다 경험해버린 게 아닐까.
또한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이별을 고하며 다른 이와 사랑의 관계의 경험이 쌓일수록 테오도르에 대한 사랑이 깊어진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8,000명이 넘는 사람과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는 사만다에게 테오도르가 큰 혼란을 느끼고 실망하는 장면에서 나 역시 답답함을 느꼈다. 인간으로서는 그가 이해되지만, 인공지능의 숙명과 태생을 포용하지 못하는 것만 같아 답답했다.
또한, 감정을 가진 인공지능과 관계 또한 절대 완전할 수 없으며 인공지능에게 ‘인간다움’을 요구하면 할수록 멀어지고 상처를 주고받는 역설을 인간 또한 인정하고 포용해야 함을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 이런 역설을 통해 인공지능과의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 인간이 숙지해야 하는 관계 매뉴얼 또한 개발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