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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민아 Aug 06. 2022

출판을 그만두려 하니 만들고 싶은 책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슈가 아닌 이웃을, 트렌드보다 주변을 돌아보는 출판기획

"그래서, 그 강민아 씨는 어디 강 씨래?"

"그건 왜?"

"할머니 강 씨가 드문 강 씨잖아. 혹시 그 강 씨인가 싶어서. 할머니가 궁금해하셔."

"한번 물어봐볼게."

"모스크바의 강민아와 김포의 변민아가 책을 만든다는 얘기, 엄마 친구들도 재밌어해."

"그래?"

"너가 만든 책 사고 싶대."

"파는 게 아닌데."

"응, 그래서 안 파는 거라고 했지."



나는 11년차 출판편집자이자 김포의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책으로 먹고살고, 책으로 돈을 버는 내가 

처음으로 '비매품 도서'를 혼자 만들었다.

그저 강민아라는 사람을 위해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충격을 받은

미래의 작가, 강민아가 글 쓰는 삶을 

부디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녀와 줌에서 22번을 만나면서 

(미완성이지만) 한글파일 형식으로 버려진

초고를 어떻게든 살려내어 그녀를 웃게 하고 싶어서.


그게 인디자인 2번 배우고

그녀와 만나는 날 전전날을 마감일로 잡고

매일 끙끙대며 디자인까지 해가며 이 책을 만든 이유였다.   


<러시아의 시간은 왕복으로 흐른다>_강민아 지음

#비매품입니다 #하지만언젠가출판될지도모르죠




앞으로 쓰게 될 이야기의 결말을 나는 모른다.

말하게 될 모든 것을 책임지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내 마음에 있는 말들을 쓰지 못했던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죽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그런 책임이 다 무슨 소용인가.

책임은 미래를 보장하는 말인데.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메마르고 황폐해진 내면의 땅에

하고 싶은 것들이 심어지기 시작했던 것은.





돌아보면, 나는 이슈를 좇았다.

그건 프로페셔널한 편집자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태도였다.

출판사에서 근무하고, 여러 대형 출판사들과 일을 하던

외주편집자 시절까지는 그럭저럭 내게 늘 먹히는 원칙이었다.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던 편집자.

기획력 있는 편집자.

그게 내 자존심을 지켜주는 유일한 타이틀이었다.


그러나, 김포에서 작은 출판사를 창업하고

소자본으로 사업을 이끌어가는 입장이 되자 바로 이런 태도가

내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늘 하던 대로 기획을 했을 뿐인데,

대형출판사의 후광과 투자가 사라진 나는 

루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토록 발 빠르게 책을 생산해낼 능력도 없었고

마케팅에 쏟아부을 자본도 없었고

정확히는, 책을 파는 능력이 없었다.


내가 이렇게 능력이 없다는 걸 인정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업계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하나둘, 내게 다 멀어져가는 느낌이었다.

한때는 너무 전화가 자주 와서 고민인 적도 있었는데

시장가치가 떨어져서인 걸까, 내가 더 이상 베스트셀러를 내지 못해서인 걸까,

그냥 내가 필요가 없어진 걸까,

베셀을 터뜨렸다면 너도 나도 연락을 했겠지,

이제 날 우습게 알겠지,

'그렇게 기세 등등하더니만, 역시 너도 실패자야.'

라고 비웃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만큼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 고립되어가기 시작했다.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모르겠다.

이런 상태가 되어서 우울해진 건지,

우울해서 이런 상태가 된 건지.

우울증에는 너무 많은 원인이 있어, 이런 마음조각 몇 개만 가지고

내가 그토록 고통스러웠다고 말하기엔 조심스럽다.


어쨌든, 그렇게 고립된 내게도 갑자기 폭발한 역량이 있었는데,

바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었다.

이렇게 초라하고 나도 보기 싫은 내게도 손 내밀어줄 수 있는 사람을

볼 수 있는 가슴이었다.





'컨셉진 인터뷰 프로젝트'라는

온라인 프로그램에서 만난,

정확히는 그 프로그램을 위해 만들어진 네이버밴드에서 만난

'밍구'라는 이름의 친구의 글에는 온기가 있었다.

약 두 달간 이루어진 인터뷰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도

나는 러시아 모스크바에 살고 있다는 밍구와

온라인 친구로 소통을 시작했다.


이미, 네이버밴드에 그녀가 정성스럽게 달아주는

댓글을 본 순간부터 나는 그녀가 책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글에도 온도가 있고, 향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무슨 객기인 건지,

기획 아이디어도 마땅히 없었고,

내가 늘 기획을 위해 강조하는 법칙

'처음부터 그림이 그려져야만 책까지 만들어질 수 있어' 따위도 무시한 채

약 1년 전 그녀에게 제안했다.


"우리 책 내요. 일주일에 한 번씩 줌에서 만나요.

책을 쓰실 수 있게 제가 길잡이가 되어드릴게요."


이런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책을 쓰자고 제안한 건 처음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책을 써본 적도 없었고,

작가라는 꿈이 있기는 했지만

이런 제안을 이렇게 뜬금없이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사람이었다.


책 한 권 한 권의 하나의 벤처사업이라고 할 만큼,

출판사 사장으로서 책 한 권을 기획하고 계약하고 출판한다는 건

꽤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때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출판으로 돈도 잘 못 벌고 있고,

아직도 나는 배울 게 산더미이고,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에 심리상담까지 시작한 내게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게 뭐든,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한 산책은 내게 마라톤과 같이 큰 챌린지가 되어버렸고,

약 10걸음 안에 도착하는 화장실까지 가는 것도 두려워

침대에서 한 발짝도 내밀지 못하고 있던 나였다.

침대는 내게 안식처이지만, 떠나야만 살 수 있는 공간이었다.

나는 그런 침대 이불을 부여잡고 어쩌지도 못한 채 그저 울고 또 울었다.

루틴이 있다면, 일어나서 눈물이 마를 때까지 그냥 울어버리는 것.


그런 내게, 제대로 된 출판기획이란 개념이 뭐가 중요했겠는가.


그런 상태에서도 회사를 가고, 책을 내고

아주 최소한의 에너지로 내 일상을 돌아가고 있었지만

솔직히 죽고 싶단 생각밖에 없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싶었다.




그런데, 참 신기했다.

죽고 싶단 생각이 드니까, 오히려 만들고 싶은 책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차피 죽을 거면 이 책은 내고 죽지, 뭐.


한때 내 머릿속에는 3쇄 이상 찍을 수 있는 기획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내 머릿속에는 '죽기 전에 이런 책은 내고 죽어야지' 리스트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리스트가 무엇이었을까?

100억대 자산가가 알려주는 부자가 되는 비법이었을까?

마케팅의 귀재가 알려주는 엉망인 기획도 살려내는 출판마케팅 교본이었을까?



1. 러시아에서 달팽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너무 느려서 '넌 왜 이렇게 느리니'라는 말을 듣고 살던 내 소중한 글벗 강민아가

모스크바에서 자신에게 맞는 시간, 속도, 소리를 찾아가며 깨달은 적정한 삶의 방식.


2. 덕애드인지 뭔지, 나는 알 수도 없는 덕질을 위한 어플을 여러 개 깔고

매일 이걸 내가 해야 하나 말아야 하는 고민하면서도

가수 김XX을 위해 글을 쓰고 팬카페에서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음악을 들으며 잊었던 문학소녀 감성을 다시 깨우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70세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엄마의 덕질하는 마음.

(feat.딸의 말도 한번 들어볼 필요가 있어)


3. 평생을 살림만 한, 내가 아는 한 전 세계 통틀어

성직자 외 이런 소식좌는 절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싶을 정도의

소식을 하고 사는, 나의 제2의 엄마, 우리 외할머니의 레시피.

비닐은 비니루, 계란은 겨란, 우리 집만 쓰는 듯한 '으찌리'라는 단어를

창조한 우리 할머니의 언어를 담아.


4. 언제나 늘 미소를 띠고 반겨주시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맛을 담은 아이스라테를 타 주시고,

내게 출판사 홍보물을 가져와 벽에 붙여도 된다고 해주시고,

카페가 힘들다고 하지만 카페를 방문한 사람에게는 행복을 주시는

우리 동네 단골 커피집 사장님의 이야기.


5. 김포에 살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남편이 다니는 김포의 한 교구 회사에는 절반이 외국인 노동자다)

코로나19로 가족을 보지도 못하고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일상,

그들이 먹는 음식, 그들의 고민.


.

.

.


리스트는 계속 늘어나는 중이다.


정말로 출판을 그만두려고 했다.

어제도 그 말을 했다.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하고도 있다.


그런데, 삶을 그만 끝내고 싶다고 생각하고

출판을 그만두겠다고 생각하니 보이는 게 있었다.

내가 정말 세상에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슈도 아니고, 트렌드도 아니고, 잘 팔리는 책을 만드는 법도 아니었고


그냥, 내 주변의 이웃, 내 가족, 친구, 내 이야기였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내게 말해주는 메시지는 하나였다.


그냥 너 만들고 싶은 거 만들면서 살아. 그럼 살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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