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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번만 더 May 14. 2024

34. 다시 만난 까예, 나는 결말을 미루고 있었다

28일 차, 계속 멜리데에서

8월 29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갈리시아의 쌀쌀한 아침. 6시가 되자 눈이 자동으로 떠지고 몸이 저절로 일어났다. 하지만 오늘은 멜리데에서 쉬며 연박을 할 것이므로 조금 더 눈을 붙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빰쁠로나, 에스떼야, 로그로뇨, 부르고스, 레온 등 먹고 놀기 좋다는 도시를 무수히 지나쳐 온 바 있다. 그런데 멜리데가 까미노에서 처음으로 연박을 하는 도시가 될 줄이야.



어젯밤 까예따나에게서 보고 싶다는 DM이 왔고 오늘은 멜리데에서 묵는다기에 여기서 기다리기로 했다. (얘는 16살이고 보고 싶다는 데는 사연이 있으나 글로 쓸지는 나중에 정하겠습니다.)



원래는 8시 전에는 알베르게를 나가야 하지만 눈치를 보며 10시 반까지 휴게실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걷지 않는 오전은 뭔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다. 할 일을 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근처 골목에서 아무 의미 없는 사진을 찍었다. 11시쯤 되자 순례자들이 물결처럼 팔라스 데 레이에서 밀려오고 있었다. 14km 남짓이니 7시에만 출발해도 11시 전후에 충분히 닿을 거리. 일찍 떠났거나 발걸음이 빠른 이들은 이미 지나가고도 남았을 터. 로베르토, 주제페, 테레사, 산티아고, 마리오는 내가 알베르게에 앉아 있는 사이에 이미 여길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직 인파 속에 아는 얼굴이 간간이 섞여 있었다.


비비

걸음이 느린 비비도 멜리데에 도착했고 그녀는 오늘 아르수아까지 간다고 했다. 늦기 전에 가라고 산티아고에서 보자며 손을 흔들었다.


성당 문앞에 앉아 비를 긋는 파올라


San Xil 길 기부제 쉼터에서 잠시 보았던 여자아이가 비를 피해 교회당 입구에 앉아 있었다. 눈을 마주쳐 오는 걸 보니 나를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우쿨렐레를 치며 노래하던걸 기억한다고 한다. 이름은 파올라이며 비건이라 문어를 먹지 않고 멜리데를 지나가겠다 하였다. 공장식 동물 사육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선 비건 생활을 하고 있다는데 언제까지 지속할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둘이 교회앞에 앉아 복숭아 하나를 나누어 먹었다.


나는 비록 고기가 맛있어서 끊지 못하지만 이런 신념을 존중한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양계장을 하셨었다. 난 닭장같이 좁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논란에 축산과 정육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생계가 걸려 있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신념을 논리로 비난해선 안된다는 것도 안다.



내가 기다리는 까예와 테레사 모녀는 아직이었다. 배낭도 무거운데 아픈 발과 다리를 끌며 오고 있겠지. 어딘가 중간 까페에서 오래 쉬고 있을 수도 있고.

멜리데 초입, 까페 야외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며 그들을 기다렸다.



오후가 가까워 오며 산티아고 쪽 멀리 있는 하늘부터 점차 맑아져 왔다. 그래도 바람은 여전히 쌀쌀하여 작은 커피잔은 금방 온기를 잃어버렸다.


지나가는 얼굴들을 들여다보며 확인하길 30여 분, 12시 반쯤 둘이 도착했고 까페에 앉아 있는 나를 보자 활짝 웃었다. 공립 알베르게가 여는 시간까지 30분 정도 여유가 있기에 둘의 마실 것을 주문해서 다시 앉았다. 서로 말도 잘 통하지 않는데 연신 번역기를 통해서 말을 걸어왔다. 이런저런 걷는 이야기만 해도 30분이 금방 지나갔다.


한시가 가까이 되어 공립 알베르게까지 가서 줄을 섰지만 나는 어제 묵었다는 이유로 연박을 거절당했다. 자리가 많이 남으니 그리 엄격하진 않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리셉션의 직원은 자신의 업무에 충실하기만 했다. 난 바로 앞에 사립으로 가겠다며 모녀에게 여기 묵으랬지만 테레사는 리셉셔니스트에게 벌컥 화를 내며 함께 나와버렸다.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약간 난감하였다. 나라도 나오는 결정을 했겠지만 지금은 아무튼 폐를 끼치는 모양새가 되었다.


결국 셋이서 여기저기 알아보다 도시 초입에 있는 멜리데 알베르게에 묵기로 하였다. 여기도 자리는 여유롭게 많았고 멜리데가 그리 숙박이 어려운 도시는 아닌듯 했다.


반면 점심을 먹고 아르수아까지 가는 순례객들로 인해 식당들은 매우 바쁘다. 특히 뿔뻬리아는 점심때쯤 빈자리를 찾기가 어렵다. 많은 순례자들이 긴 의자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문어와 가리비를 먹느라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멜리데 호스텔은 까페를 겸하고 있는 아담한 알베르게이다. 시설은 깨끗하며 와이파이가 강력하다. 고양이 두 마리가 있다는 장점이 있다. 주방은 토스터 마이크로웨이브 전기포트 등 간단한 것만 가능하다.


셋이서 빨래를 모아 한방에 세탁을 돌리고 건조는 주인장에게 부탁한 후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테레사는 해산물 알러지가 있다 했다. 서양인은 의외로 알러지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쫄깃한 식재료의 식감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떡볶이가 고무같이 츄이하다고 안 먹는 사람도 여럿 보았다. 그래도 멜리데에 왔으니 이들도 뿔뻬리아 구경은 해야겠지 싶어 가장 유명한 A Garnacha에 자리를 잡았다. 어제 나는 에제키엘에서 저녁을 먹었기 때문에 비교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뿔뽀와 파드론 고추 구이, 쇠고기 구이를 시키고 곁눈질로 가게를 살폈다. 아무 생각 없이 잡은 자리가 구경하는데 가장 좋은 자리란 걸 깨닫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때마침 나온 빈자리가 문어를 조리하는 들통 바로 위쪽 자리였던 것. 지나가던 순례자들마다 문어에 시선을 빼앗겼다. 보란 듯이 김이 무럭무럭 나는 문어를 조리대 위에 꺼내놓기도 하고 한 점 시식을 권하는 등 장사 수완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냥 지나가려다가도 저절로 발길이 가게 안으로 향하게 된다.



해산물을 안 먹는 테레사도 궁금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목을 길게 빼고 문어 조리 코너를 자꾸 살펴보았다. 까예도 문어의 식감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엄마가 해산물 알러지이니 당연히 집에서 많이 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맛은 어제 에제키엘에서 먹은 것도 훌륭했지만 분위기는 여기가 판정승이다. 문어를 부드럽게 요리하는 방법에 대해 쉐프에게 물어봤는데 익히기 전엔 많이 두드리고, 조리는 약하게 한 시간가량 오래 끓이는 게 비법이란다. 문어는 살짝 데치면 오히려 질기다고 한다. 후에 DM으로 사진 써도 되냐 물으니 물론이라고.


이름은 세르히오이며 “문어 맛있어요”라며 한국말도 몇 마디 할 줄 안다. 문어 모양 세요도 꼭 찍어가라며 당부한다. 세요가 멋있게 생기진 않았다. 테레사와 스페인어로 한참 대화를 하는데 스페인어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테레사가 점심을 샀다. 44유로가 나온 것을 굳이 자기가 내겠다는데 이것도 약간 어색한 모양새다. 각자 내는 문화인지 어떤지 스페인 문화를 모르니 어떻게 하기가 어려웠다.


 나중에 돌아와서 까예에게 물어보니 친구 사이엔 ‘이번엔 내가 사면 다음엔 얻어먹은 사람이 사고’ 같은 한국식 비슷한 문화가 있다 했다.


스페인 사람들이 “초대” 한다고 하면 이건 자기가 사겠다는 의미이다. 돌이켜보면 수비리에서도 알베르게집 딸 레이레가 “초대” 한다며 저녁을 먹으러 갔었는데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내가 다 냈었다.


점심을 먹고 간식거리 장을 보아 돌아왔다. 거한 점심을 먹었으니 저녁은 간단히 해결할 요량이었다. 사실 나만 거하게 먹은 건가 싶기도 하다. 내일은 가는 길에 커피랑 많이 사야 할 듯하다.



걷지 않는 하루가 저물었다. 물론 오늘은 까예 때문에 라는 핑계를 대고 있지만, 불과 50km를 남겨두고 나는 골인을 뒤로 미루고 있었다. 쉬지 않고 달려올 때와 다르게 막상 결승선을 앞에 두고선 머뭇대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하는 것일까.


멜리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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