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번만 더 May 15. 2024

36. 더 라스트 댄스

30일 차, 아르수아 - 몬테 도 고소 34.3km


사생활에 관계된 부분은 삭제, 수정하였기 때문에 글의 흐름이 다소 원활하지 않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8월 31일



6시에 일어나 7시에 길을 떠났다. 카페에서 내온 미지근한 커피를 마시고 곧 아르수아를 벗어나자, 걷기 좋은 숲길이 이어졌다.



요즘은 계속 아침에 흐리며 안개비가 오다가, 오후에 개는 날씨가 반복되고 있다.



울창하게 자란 나무의 터널이 길게 뻗어 있었다. 오늘처럼 숲으로 지나갈 땐 비를 거의 맞지 않는다. 맑은 날엔 해를 가려주고 궂을 땐 비도 막아주니 참 고마운 일이다.


 ​

오 페드로소에 한시쯤 도착할 요량이었다. 길이 어렵지 않으니 중간중간 카페에 들러도 속도가 빠르다.


카페에 앉아 아침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모녀가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힐링 여행으론 참 순례길만한 곳이 없다.



이들에게도 치유해야 할 아픈 기억이 있다. 이렇게 밝고 잘 웃는 녀석에게 아픈 과거가 있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까예는 전에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9월부턴 새로운 학교로 간다고 했다. 새 학기 시작 전 테레사가 휴가를 내어 둘이 순례길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오 세브레이로의 공립 알베르게 키친에서 나를 처음 만났다. 내가 페데리카를 따라 라스 헤레리아스에 멈추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트리아카스텔라에선 우연히 같은 방을 쓰게 되었고, 사리아에선 내가 있는 숙소에 따라 들어와 묵었다. 그리고 포르토마린까지 함께 걷고, 팔라스 데 레이를 그냥 지나쳐 헤어지게 되자, 멜리데에 있는 나더러 DM을 보내어 보고 싶다 했다.


뭔가 이상하다 생각은 했지만 큰 아픔이 있는 줄은 알지 못했고, 왜 잠시 스쳐간 순례자에 불과한 나에게 도움을 청했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같이 묵묵히 걸어주는 일 외엔 달리 해줄 것도 없다. 이 녀석과 걷느라 오래 같이 걸어온 동료들을 먼저 보냈지만, 한 인간이 회복하는 일보다 값진 일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사과며 배가 잔뜩 땅에 떨어져 있다. 이렇게 낙과가 있는 곳은 벌을 조심해야 한다. 먹이를 찾는 벌들이 낙과에 새까맣게 모여든다.



호주를 떠난 뒤로 이렇게 울창한 유칼립터스 숲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이파리를 만져보고 냄새를 맡았다. 비가 자주 오는 지역이라 유칼립터스 고목에 초록색의 이끼가 잔뜩 붙어 있었다. 깨끗한 공기와 오래 가꾼 숲이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낸 모습이다.



오 페드로소에 들어서니 11시 40분이었다. 너무 빨리 도착해 알베르게 오픈까지 1시간 20분이나 남아있었다. 모녀도 불과 며칠 사이에 다리 힘이 더 붙은 것이다.


이렇게 되니 둘은 거리 욕심이 생겼는지 몬테 도 고소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얼마나 더 걸릴지를 물어왔다. 이미 20km 가까이 왔지만 14.5km를 더 가야 하는 셈이다. 4시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되나, 오후에 체력이 떨어지면 더 많이 쉬어야 하고 걷는 속도도 떨어진다.


“괜찮겠어?”를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두 모녀는 이미 단단히 결심이 선 모양이었다.



간단히 음료만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섰다. 남들은 한 번에 가는 구간조차 나누어 끊어가는 이 둘이, 이번 여행을 끝내고 집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뭔가를 해보고 싶은 것이었다. 한계와 컴포트 존을 넘어서는 그들의 라스트 댄스를 추려는 것이었다.


많이 쉬어 갔지만 예상대로 마지막 5km를 남겨두고는 현저하게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마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바닥 뼈가 가죽과 신발의 충격 완화 없이 땅바닥에 곧바로 부딪히는 그런 느낌일 것이다.


이제 10km 남았다

그래도 둘 다 이를 악물고 언덕을 한걸음 한걸음 올라갔다. 가방을 들어주겠다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으나 힘을 짜내서 뭔가 하려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꺼내는 건 정말 결례다. 그냥 옆에서 괜찮을까 안절부절못하며 같이 걸을 수밖에 없었다.



산 마르코스의 언덕을 오를 땐 보다 못해 결국 가방을 내려놓으라고 말했지만 단호한 대답 “No.”가 돌아왔다. 거의 다 왔는데 여기서 도움을 받으면 그동안의 고생마저 빛이 바랠 것 같은 그런 기분일 거라고 짐작했다.


결국 몬테 도 고소의 알베르게를 목전에 둔 채, 마지막 휴식을 30분이나 가졌고, 다시 출발 후 5분 만에 목적지에 다다랐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딱 5분만 더 걸었으면 되었는데 왜 쉬자고 했느냔다.


내가 보기엔 5분은커녕 거기서 다섯 걸음도 더 못 가는 상태였었다. 그리고 숙소까지 가서 쉬나 여기 바르에서 쉬고 가나 그게 그거였다.


이렇게 35km라는 괜찮은 숫자를 기록하고 둘의 라스트 댄스는 끝이 났다.



돌이켜보면 나도 처음엔 장거리를 걸을 때 걱정을 많이 했고, 힘도 많이 들었다. 로스 아르코스에서 로그로뇨 27km, 로그로뇨에서 나헤라로 이어지는 29km 구간이 처음 마주치는 시련이었다. 그런데 여기를 지나고 나니 점점 힘이 붙고 자신감이 생겨, 메세타 구간에 이르러선 35에서 40도 거뜬히 가게 되었다. 이젠 25를 안 넘으면 좀 시시한 상태다. 물론 지금은 속도와 거리가 전부가 아니다란 것도 안다.


몬테 도 고소의 공립 알베르게는 규모가 엄청나다. 그런데 묵는 사람이 많이 없고 영업하는 업소도 별로 없어 뭔가 한산한 유령 마을 같은 느낌을 준다. 수요 예측에 실패하고 쇠락해 가는 리조트의 분위기이다. 목전이 산티아고다 보니 이왕 여기까지 왔으면 바로 산티아고로 내려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여기 언덕에선 산티아고가 바로 내려다보였다.


29번 건물에 리셉션이 있다. 침실은 8인 1실. 8유로



어떻게 와이파이를 잡아 사용하는지 인스트럭션이 붙어있다. 하지만 따라 할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모녀는 내일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저녁을 내가 사기로 했다. 알베르게 단지 안에는 딱히 먹을 데가 없어 언덕을 15분쯤 내려가 Restaurante O Tangueiro로 불렀다. 저녁 운영 시간은 8-11시이다. 구글맵 평점도 괜찮고 실제로 맛도 괜찮다. 고기구이 요리를 각각 시켜서 배불리 먹고 나왔다.



내가 시킨 돼지갈비는 11.5인가 하고 까예의 스테이크가 20, 테레사 것이 16유로인가 그랬다. 메뉴 사진도 찍은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없다. 9시쯤 되면 사람이 붐비니 조금 일찍 자리 잡자. 아마 이 근방에선 제일 괜찮은 곳이 아닌가 한다.



해지는 저쪽이 바로 산티아고이다.


식당에 다녀오는 길이 왕복 2km는 족히 되었다. 내일 산티아고 갈 4km에서 반은 빼야 한다고 농담을 하자 테레사가 나더러 식당 앞에서 자라고 받아쳤다. 그러면 내일 덜 걸을 수 있다고.

7:00 ~ 16:50

아르수아 ~ 몬테 도 고소

매거진의 이전글 35. 까미노가 예비하는 대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